류중일 감독, 절망적 2군행이 보약 됐다

김남형 기자

기사입력 2011-11-02 10:39


삼성 류중일 감독. 스포츠조선 DB

삼성 류중일 감독에게도 지도자로서 대위기가 있었다.

지난 2008년 11월초였다. 삼성이 코칭스태프 개편을 했는데 뜻밖에도 류중일 코치의 2군행이 내용에 포함돼 있었다.

코치들의 1,2군 순환은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류중일 코치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류 코치는 99년말 지도자로 변신해 2군의 김성근 감독 밑에 있다가 이듬해 6월초 1군에 올랐다. 그후 줄곧 1군에서만 코치로 일했다. 선수로 뛴 13시즌 동안에도 부상이 아닌 부진으로 2군에 간 적이 한차례도 없었다.

'원조 삼성맨'에 잠재적인 '감독 후보군'의 한명으로 여겨지던 류 코치가 2군으로 내려간 건 상당히 놀라운 소식이었다. 8년5개월만의 2군행이었다. '이러다 삼성 유니폼을 벗게 되는 것 아닌가'라는 루머까지 흘러나왔다.

깜짝 놀라 류 코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살다보면 2군도 갈 수 있는 거다. 너무 오래 1군에만 있었던 것 같다. 2군에서 열심히 선수들을 육성하겠다"고 웃으며 말했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시 류중일 코치는 상심이 꽤 컸다. 자존심에도 상처를 입었다. 요즘 류 감독의 지인들 얘기를 들어보면 당시 속상해서 소줏잔도 많이 기울였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지도자가 된 뒤 처음 겪는 위기였다. "대체 네가 왜 2군으로 가게 됐냐"고 전화를 걸어오는 지인들이 많았다.

류중일 감독은 2009년 9월 중순 다시 1군 코치로 컴백했다. 결과적으로 그때 10개월간의 2군행이 류중일 감독에겐 큰 경험이 됐다. 그는 "한발 떨어져서 1군 경기 모습을 지켜보니 오히려 느끼는 게 많았다. 내가 야구 보는 눈이 넓어진 게 바로 그때였다"고 말한다. "당시 2군행이 현재 감독 역할을 수행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도 했다.


사고의 유연성을 기른 것도 그 시기였다. 올 정규시즌때 SK 최 정이 긴급상황에서 포수로 투입된 적이 있다. 그걸 본 류중일 감독은 내야수 박석민에게 잠시 포수 훈련을 지시하기도 했다. 배울 게 있으면 주저없이 실행한다.

지난해 광저우 아시안게임때의 일화다. 류중일 수비코치가 감독으로 선임되기 전인데 그는 대표팀에 합류했다. 삼성 소속의 내야수 조동찬이 훈련때 자꾸 실수를 했다. 류 감독은 "대체 너네 팀 수비코치가 누군데 그 모양이냐"라고 큰소리로 외쳐 주위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독설의 시대다. 하지만 온화한 유머가 힘을 낼 수 있다는 걸 올시즌 삼성 야구가 증명했다. 마냥 유머만 있는 건 아니다. 류중일 감독은 "난 독한 스타일이 못 된다. 평소엔 말도 빠르고 촐랑대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면 침착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올초 오키나와 전지훈련이 끝날 때쯤 류중일 감독은 송삼봉 단장에게 "한국 들어가기 참 싫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장원삼의 부상, 기대 이하의 용병, 타자들의 컨디션 난조 등 머리아픈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엔 기대 이상, 아니 최고의 성적을 냈다. 허술한 듯 유머가 넘치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상황에 빠르게 대처한다. 부임 첫해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류중일 감독은 21세기의 두번째 10년에 필요한 지도자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김남형 기자 star@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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