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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류중일 감독에게도 지도자로서 대위기가 있었다.
지난 2008년 11월초였다. 삼성이 코칭스태프 개편을 했는데 뜻밖에도 류중일 코치의 2군행이 내용에 포함돼 있었다.
'원조 삼성맨'에 잠재적인 '감독 후보군'의 한명으로 여겨지던 류 코치가 2군으로 내려간 건 상당히 놀라운 소식이었다. 8년5개월만의 2군행이었다. '이러다 삼성 유니폼을 벗게 되는 것 아닌가'라는 루머까지 흘러나왔다.
깜짝 놀라 류 코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살다보면 2군도 갈 수 있는 거다. 너무 오래 1군에만 있었던 것 같다. 2군에서 열심히 선수들을 육성하겠다"고 웃으며 말했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시 류중일 코치는 상심이 꽤 컸다. 자존심에도 상처를 입었다. 요즘 류 감독의 지인들 얘기를 들어보면 당시 속상해서 소줏잔도 많이 기울였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지도자가 된 뒤 처음 겪는 위기였다. "대체 네가 왜 2군으로 가게 됐냐"고 전화를 걸어오는 지인들이 많았다.
류중일 감독은 2009년 9월 중순 다시 1군 코치로 컴백했다. 결과적으로 그때 10개월간의 2군행이 류중일 감독에겐 큰 경험이 됐다. 그는 "한발 떨어져서 1군 경기 모습을 지켜보니 오히려 느끼는 게 많았다. 내가 야구 보는 눈이 넓어진 게 바로 그때였다"고 말한다. "당시 2군행이 현재 감독 역할을 수행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도 했다.
사고의 유연성을 기른 것도 그 시기였다. 올 정규시즌때 SK 최 정이 긴급상황에서 포수로 투입된 적이 있다. 그걸 본 류중일 감독은 내야수 박석민에게 잠시 포수 훈련을 지시하기도 했다. 배울 게 있으면 주저없이 실행한다.
지난해 광저우 아시안게임때의 일화다. 류중일 수비코치가 감독으로 선임되기 전인데 그는 대표팀에 합류했다. 삼성 소속의 내야수 조동찬이 훈련때 자꾸 실수를 했다. 류 감독은 "대체 너네 팀 수비코치가 누군데 그 모양이냐"라고 큰소리로 외쳐 주위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독설의 시대다. 하지만 온화한 유머가 힘을 낼 수 있다는 걸 올시즌 삼성 야구가 증명했다. 마냥 유머만 있는 건 아니다. 류중일 감독은 "난 독한 스타일이 못 된다. 평소엔 말도 빠르고 촐랑대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면 침착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올초 오키나와 전지훈련이 끝날 때쯤 류중일 감독은 송삼봉 단장에게 "한국 들어가기 참 싫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장원삼의 부상, 기대 이하의 용병, 타자들의 컨디션 난조 등 머리아픈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엔 기대 이상, 아니 최고의 성적을 냈다. 허술한 듯 유머가 넘치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상황에 빠르게 대처한다. 부임 첫해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류중일 감독은 21세기의 두번째 10년에 필요한 지도자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김남형 기자 star@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