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전영지 기자]"누군가가 긴 안목으로 준비한 일의 열매를 내가 딴 것이다. 나도 수원의 미래를 준비하겠다." 수원FC의 '낭만 리더', 최순호 단장이 지난 16일 수원 화성행궁 광장에서 성대하게 펼쳐진 수원FC위민의 우승 팬 페스타 현장에서 겸손한 소감을 전했다. 올 시즌 수원FC는 강했다. 김은중 감독이 이끄는 수원FC는 일찌감치 '윗물행'을 확정지었고, 수원FC위민은 WK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 리그 우승팀 화천KSPO를 꺾고 14년 만의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남녀 동반 최고 성적. 지난해 1월 수원FC 수장에 취임한 최 단장은 하루아침에 나온 성과가 아님을 강조했다.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은 운이고 복이다. 앞선 누군가가 노력한 덕분에 내게 복이 온 것이다. 행정은 긴 호흡으로 미래를 계획하고, 오늘 당장 내가 열매를 못 따더라도 훗날 누군가 따면 된다는 마음으로 오늘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 성과의 75%는 먼저 걸어간 분들이 준비한 것, 25%는 운이 작용한 것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앞으로 올 이들을 위한 75%를 만드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수원FC의 윗물 "김은중이니까 해낸 일"
최 단장은 한 시즌을 돌아보며 "상위 스플릿의 성과는 김은중 감독의 능력"이라고 단언했다. "김은중이니까 해낸 것"이라고 했다. 프로 무대는 처음인 김 감독을 믿고 쓴 최 단장은 "내가 생각한 그대로"라고 평했다. "'샤프'라는 별명은 날카롭지만 내가 볼 때 김 감독은 묵묵하고 반듯하다"고 평가했다. "가는 길이 반듯하기 때문에 축구도 반듯할 것으로 봤다. 군더더기가 없고 단단하다. 그 인상 그대로 올 시즌 그런 축구를 했다"고 돌아봤다. "선수 능력의 최대치를 이끌어내고, 타구단에서 어려움을 겪던 선수들도 살려놨다"면서 "사실 내 계획은 강등 걱정 없는 7~9위였다. 김 감독이 그 이상을 해줬다. 이제 내가 감독의 계획에 맞춰야 한다"며 웃었다. '김은중호'에게 '상위 스플릿'은 어느새 디폴트 값(자동설정 값)이 됐다. 최 단장은 "일단 상위 스플릿에 꾸준히 드는 팀이 돼야 한다"면서 "난 모든 걸 장기적으로 본다. 단계적인 계획을 갖고 꾸준히 가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올 시즌 손준호를 영입한 후 계약해지한 일은 K리그 최대 이슈였다. 6월 영입할 때만 해도 '중국서 고초를 겪고 왔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무죄 추정의 원칙, 애제자에 대한 믿음으로 영입을 결정했고, 계약서에 입단 전의 일로 선수활동을 할 수 없게 될 경우 계약 해지를 협의한다는 조항을 넣었다. 9월 중순 문제 발생 후 계약을 해지했다. 손준호에게 들어간 돈은 총 2억4000만원, 손준호가 뛴 12경기 승점은 21점이다. 최 단장은 "행정하면서 잘된 부분, 놓친 부분, 안된 부문을 늘 메모하고 되돌아본다. 결정권자로서 많은 이들의 윤리, 도덕, 인식이 각자 다를 수 있다는 점, 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대중과 팬들을 상대하는 프로구단으로서 더 신중해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수원FC위민의 우승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한 가난한 아빠 마음"
최 단장은 수원FC위민 우승에 대해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내가 있을 때 14년 만의 우승이라니 정말 운이 좋다. 우승은 바람이 불어야 한다"며 웃었다. "박길영 감독은 여자선수들을 관리하는 법을 안다. 소통을 잘하는 감독이고, 선수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감독"이라고 평가했다. "화천은 파워풀하고.우리는 아기자기하다. 올 시즌 화천을 상대로 내내 밀렸다가 결정적인 때 승리했다.플레이오프, 챔프전, 일주일에 3경기를 하는 강행군 속에 컨디션 조절을 잘했다. 선수들이 기세를 탔다"며 우승 요인을 분석했다. 최 단장은 수원시와 함께 우승상금 7000만원을 전달했고, 첫 동계 해외전훈도 약속했다.
최 단장은 여자축구를 향한 '가난한 아빠의 마음'을 고백했다. 그는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서울로 유학을 보냈고, 외국 유학까지 간다는데… 더 잘 뒷바라지 못해주는 아빠의 마음같았다"고 했다. "하지만 선수들에게 '가난한 아빠도 꿈은 있었다'는 말을 해줬다. 차마 말 못한 우승의 꿈을 선수들이 이뤄줬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운 좋은 한해였다. 나도 수원의 미래를 위해 할 일을 할 것이다. 시민구단은 팬들과 시, 의회, 이사회, 연맹, 협회 얽히고 설킨 관계들이 많다. 그 안에서 설득하고 잘 소통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했다.
지난 2년간 시민구단 단장으로서 힘들었던 일을 묻자 최 단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힘들지 않았다.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고 한홍기 감독님, 고 박태준 회장님(포스코)의 가르침 덕분이다. 한 감독님은 세상을 넓고 깊게 보셨다. 선수를 대하는 태도를 그분께 배웠다. 박 회장님께는 일하는 법, 사람과 시스템의 중요성을 배웠다."
레전드 축구인지만 최 단장은 감독의 일에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 매 홈경기 후 본부석, 자신의 자리에서 꼿꼿이 선 채 선수들을 향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뿐, 그라운드, 라커룸과는 철저히 거리를 둔다. 최 단장은 "작년 강등 위기 때 선수들에게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가 담긴 편지를 라커룸에 보낸 적은 있다"고 했다.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그때/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중략)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결국 그 벽을 넘는다.' "축구는 담쟁이와 똑같다. 함께 올라가야 한다.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수원FC위민 챔피언 모자를 쓴 최 단장이 소년처럼 웃었다. 수원=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