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중머우 "이건희는 시대의 흐름 주도한 영웅"
TSMC 한때 삼성에 패퇴…실패 딛고 파운드리 1위로 우뚝
TSMC 발자취가 주는 교훈…신간 'tsmc 세계 1위의 비밀'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이건희는 비록 반도체 전문가가 아니지만 반도체의 잠재력을 알고 있었고, 휴대전화의 잠재력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주도한 영웅입니다."
타이완반도체제조회사(TSMC)를 설립하기 전 장중머우(張忠謀·모리스 창·93)가 2021년 경제지 '웰스'(Wealth)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지금은 '위기의 삼성'이 거론되지만, 한때 삼성전자는 반도체 시장에서 압도적인 파워를 보여준 기업이었다. 반도체 업계를 40년 넘게 취재한 대만 저널리스트 린훙원(林宏文)이 쓴 신간 'tsmc 세계 1위의 비밀'(생각의힘)에 따르면 수많은 대만 기업이 삼성의 힘에 밀려 세계 전자 시장에서 패퇴했다. 2008년 금융위기 후 삼성은 불과 4년 만에 대만 D램, 패널, 휴대전화 업체의 경쟁자들을 수두룩하게 무너뜨렸다.
규모의 경제가 경쟁에서 유리하게 작용했다. 삼성은 자체 브랜드도 많고, 각종 부품 사업도 갖고 있어서 상대를 요리할 수 있는 수단이 다양했다. 예전에는 일본 기업을 상대로 싸워 이겼고, 대만과 중국 기업들이 도전하자 가차 없이 짓눌렀다. TSMC도 희생자 중 하나였다. TSMC는 한때 자회사인 뱅가드를 통해 D램을 생산했다가 삼성전자와의 경쟁에서 완패했다. D램 사업에서 철수한 뒤에야 비로소 TSMC의 전성기가 찾아왔다. 장중머우는 삼성을 "위협적인(formidable) 상대"라고 평가했다. 그는 삼성을 가공할 만한 상대로 인식하고 시시각각 경계해왔다고 했다.
장이머우는 반도체 엔지니어 출신이다. 미국의 대표적 반도체 기업 텍사스 인스트루먼츠 부사장과 반도체 부문장을 지내며 회사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당시 IBM 관계자들마저 장중머우가 창안한 방법론을 연구하기 위해 텍사스에 모여들 정도였다. 장중머우는 1976년 부사장 시절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고객이 설계한 반도체 제조만을 담당하는 회사를 건립하자고 건의했다가 내부 반발에 부딪혔다. 그로부터 10여년 뒤 그는 대만으로 자리를 옮겨 자신의 계획을 직접 실행했다. 파운드리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업, TSMC를 1987년 창업한 것이다.
그는 설립부터 위탁생산만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을 목표로 했다. TSMC는 삼성전자와는 달리 설립 이래 지금까지 인텔의 자리를 넘본 적이 없었고, 인텔의 주문을 받아 생산하는 역할만 충실히 했다. 반도체 패권을 쥐려는 한국, 일본, 중국의 기업처럼 행동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고객사(팹리스·반도체 설계기업)가 설계한 대로 반도체를 주문 제작하는 데 역량을 집중했다. 화려한 명성보단 실리를 택하는 게 중국 본토 출신 공학자 장중머우의 계산법이었다.
대만 학계에선 위탁생산업체인 TSMC를 비아냥댔다. 명문 국립대만대 화학과 석사 졸업생의 90%가 TSMC에 취업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담당 교수는 "석사과정을 폐지하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 위탁생산이나 하는 TSMC의 직업훈련소 역할을 계속하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장중머우는 학계의 반응을 이런 말로 일축했다.
"사람들이 우리를 위탁생산업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우린 돈을 들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은행에 가니까."
실제 TSMC는 애플, 엔비디아, 구글 같은 빅테크가 설계한 반도체 위탁생산을 독점하며 엄청난 돈을 쓸어 담고 있다. 올해 3분기에 순이익으로만 3천252억6천만 대만달러(약 14조원)를 거둬들였다. TSMC가 인공지능(AI) 반도체 생산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작년 동기보다 순이익이 54.2%나 늘어난 것이다. TSMC의 파운드리 분야 세계 점유율은 이제 60%를 웃돈다. 2009년 파운드리 분야에 뛰어들며 전력을 다한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10%대 초반에 불과하다.
TSMC의 성공에는 우수한 인력, 전문적인 분업과 개발, 연구개발(R&D)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 대만 기업과의 내부 경쟁 등이 꼽힌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운드리만 파고든 무서운 집중력이 성공에 한몫했다. 이들이 파운드리에 주력한 건 반도체 설계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그 기술은 차고 넘쳤다.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권석준 교수는 책 추천사에서 "TSMC는 공정과 제조 전문임에도 웬만한 팹리스보다 훨씬 더 설계를 잘 알고 있고, 팹리스 회사들이 겪는 성능 구현 문제에 대한 IP 솔루션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마치 실력이 월등한 일식 요리사가 고객의 취향에 맞게 알아서 코스를 준비하고 도구와 재료를 미리 선별해 놓은 것처럼, TSMC도 팹리스 고객을 위해 성능 구현에 알맞은 코스를 일별해 최적화된 타이밍과 원가 기반의 칩을 제조한다"고 부연했다.
하지만 이런 고급 기술이 하루아침에 뚝딱 완성된 건 아니다. TSMC의 압도적인 파운드리 기술은 D램 개발 등 여러 실패를 통해 자신들이 무엇을 잘하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 끝에 얻은 노력과 성취의 결과다. 책 저자인 린훙원은 "세상 사람들은 지금 타이완의 성공한 모습만 보지만 30년 넘는 기자 생활을 돌이켜보면 성공보단 실패를 볼 때가 더 많았다"며 "타이완이 어떻게 그 실패를 딛고 일어났는지, 어떻게 실책에서 교훈을 얻었는지를 (책에) 자세히 기록했다"고 썼다.
허유영 옮김. 4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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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