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스포츠조선 정현석 기자]내일이 없는 가을야구는 마운드 정석 운영이 없다.
변칙이 난무한다. 오늘 승리를 위해 내일의 자원을 끌어쓰기도 불사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선발은 시즌 때 보다 더 강하게 던진다. 시즌 때 보다 악력이 일찍 빠진다. 판단은 벤치의 몫.
지금까지 결과가 좋더라도 공이 달라졌다고 판단하면 바로 내린다. 투수교체는 늦는 것 보다는 빠른 편이 낫다. 많은 승부가 불펜에서 갈린다.
그만큼 평소보다 더 강한, 더 많은 불펜진이 필요하다. 선발 투수를 당겨쓰는 이유다.
불펜 걱정이 컸던 LG는 준플레이오프에서 에르난데스 불펜 카드로 승부수를 띄웠다. 5경기 전 경기에 등판, 2세이브 1홀드로 팀을 플레이오프로 올렸다. 평균자책점은 제로였다. LG 염경엽 감독이 "내 마음 속 준플레이오프 MVP"라고 극찬하고 고마워할 만한 역투였다.
에르난데스 불펜 카드가 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최고 150㎞를 넘는 강력한 구위 덕분이다.
5위 결정전부터 와일드카드 결정전까지 치르고 올라오느라 조금씩 지쳐 가던 KT 타자들을 누를 수 있는 건 강한 공이었다. 삼성도 불펜 걱정이 있다.
오승환이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 최지광은 부상으로 일찌감치 전력 외였다. 설상가상 불펜 활약이 기대되던 백정현 마저 청백전 중 타구 사고로 미세골절 이탈했다.
박 감독은 "플레이오프를 준비하면서 불펜 고민이 많았는데 백정현까지 부상을 당해 고민이 많아졌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김태훈-이상민-임창민-김재윤으로 이어지는 필승조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베테랑 필승조는 150㎞가 넘는 광속구로 승부하는 투수들은 아니다. 기본 구위에 제구력과 변화구로 타이밍과 수싸움에 능한 유형의 투수들.
상대 타선을 윽박지르는 투수 하나가 아쉽다.
삼성 박진만 감독이 "3차전 선발까지 대기한다"며 1차전 올인을 선언한 이유.
기대를 품고 긁어볼 만한 불펜 카드가 있다. 우완 파이어볼러 김윤수다.
김윤수는 9일 대구 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자체 청백전에 백팀 5번째 투수로 등판, 1이닝을 12개의 공 만에 퍼펙투로 삭제했다. 탈삼진 2개 포함, 중심타자 3명을 상대로 깔끔한 삼자범퇴.
단 6구만에 두 타자를 빠르게 처리한 김윤수는 이재현에게 이날 가장 빠른 공인 156㎞를 전광판에 찍으며 헛스윙 삼진을 이끌어냈다.
무관중 경기로 진행됐기에 응원 리허설 빼고는 조용했던 야구장에 쩌렁쩌렁한 미트 소리가 울려퍼졌다. 거침 없는 광속구를 스트라이크존에 꽃아 넣는 모습은 상무 시절 좋았던 모습을 회복한 모양새.
삼성 불펜에는 현재 타자를 윽박지르는 빠른 공 투수가 드물다. 중요한 순간, 타자의 배트스피드를 압도할 수 있는 건 구속과 볼끝이다. 제구만 된다면 김윤수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벤치의 신뢰를 이끌어낸다면 가장 중요한 순간, 마운드에 올릴 수 있는 구위의 소유자. 삼성판 에르난데스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청백전 후 김윤수는 "오늘 경기를 통해 내가 가지고 있는 공을 던지려 노력했고 컨트롤을 잡는데 신경 썼다. 전역 후 밸런스가 무너지고 상무 시절 좋았던 피칭이 나오지 않아 직구를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 강영식 코치님이 직구 위주의 피칭으로 바꿔보자고 하셔서 패턴을 바꿨는데 최근 상무 시절 좋았던 밸런스와 직구 구위를 찾아가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플레이오프 명단에 합류하게 된다면 팀이 필요한 상황에 맞게 언제든지 등판할 수 있는 몸 상태를 만들고 장점인 강속구로 상대 타선을 압도할 수 있는 피칭으로 팀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실제 김윤수의 가치는 플레이오프 1차전에 빛났다.
디아즈의 실책과 신민재의 적시타로 3점을 추격 당해 4-7이던 7회초. 2사 1,2루 위기가 이어졌다. 타석에는 한방이 있는 오스틴.
펜스가 짧은 라이온즈파크에서 홈런 한방이면 단숨에 7-7 동점이 되는 상황. 김태훈이냐 임창민이냐를 궁금해 하고 있던 차, 불펜 문이 빼꼼 열리면서 젊은 투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이어볼러 김윤수였다. 올시즌 상무 전역 후 큰 기대를 모았지만 제구 불안으로 실망스러운 시즌을 마감했던 유망주. 이 시점에 투입할거라고 예상하기 힘들었다.
김윤수 조차 '나 맞아요?' 하는 확인 제스처 후 마운드로 달려나왔다.
초구 150㎞ 강속구에 헛스윙, 2구째 높은 코스 125㎞ 커브가 또 한번 스트라이크.
유인구는 없었다. 3구째 강력한 바깥쪽 하이패스트볼에 오스틴의 방망이가 따라가지 못했다. 3구 삼진. 오스틴이 헬멧을 던지며 분함을 표하는 순간. 라이온즈파크에는 앞선 세차례의 홈런보다 더 큰 함성이 터졌다.
벤치의 승부수 김윤수 카드가 멋지게 통하는 순간이었다.
삼성 박진만 감독은 경기 후 "김윤수의 투입은 게임 들어가기 전에 의논했던 부분이다. 불펜진 중 김윤수 구위가 가장 좋았다. 단 하나 걱정은 볼넷이었는데 이를 염두에 두면서 위기 때 삼진을 잡는 원포인트로 쓰자고 구상했던 모습 그대로 보여주면서 좋은 활약을 해준 것 같다"고 칭찬했다.
시즌 중 'Win or Wow' 대신 'Now or Never'를 포스트시즌 캐치프레이즈로 걸고 3년 만에 맞이한 삼성의 가을야구. 지금 이 순간, 아니면 내일은 없다는 비장함 속 김윤수가 사자군단 마운드의 영웅으로 포효할 채비를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