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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복 우승" 대서 특필한 1947년 '뉴욕타임즈'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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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 전 1948년 런던올림픽 참가 경위 담은 기사도

그 동안 <보스턴 선데이 글로브>(1947.4.19)를 통해 알려졌던 1947년 서윤복 선수의 보스턴마라톤대회 우승 소식이 <뉴욕타임즈>(1947.4.20)에도 실렸음이 서윤복기념사업추진위(위원장 오천진)를 통해 공개됐다.

'머나먼 코리아로부터 이기기 위해 달려왔다'는 제하의 이 기사는 서 선수의 역주 장면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폭스테리어가 그의 발꿈치로 달겨들어 넘어지고 타박상을 입었지만 다시 일어나 뛰었다'는 점을 흥미있게 다뤘다.

서윤복기념사업추진위는 또한 그 동안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나라의 첫 올림픽(런던, 1948년) 참가 경위가 자세히 실린 <뉴욕타임즈>(1947.5.14) 기사 원본도 발굴, 공개했다.

▶첫 올림픽 참가 논의-지원하는 대규모 오찬 국제 모임

서윤복(1923~2017) 선수는 1947년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우승, 해방 후 처음으로 전 세계에 코리아를 알린 인물. 그의 마라톤 세계 제패로 이듬해 런던올림픽이 참가의 길이 열렸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

정부 수립 전 우리나라의 런던올림픽에 참가는 그야말로 험난한 과정이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1946년 말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3종목 이상 국제경기연맹(ISF) 가입'과 '통일된 독립 국가'를 참가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조선일보> 1946년 12월 28일)

당시 조선체육회(회장 여운형) 산하 올림픽대책위(위원장 유억겸, 부위원장 전경무, 이상백)는 육상, 역도, 레스링, 축구, 농구, 사이클, 복싱 등 7개 종목을 ISF에 가입 신청, 5종목은 승인받았지만, 육상과 축구 2종목은 1947년 6월 15일 IOC총회(스톡홀름) 직전까지 승인을 기다려야 했다.

올림픽대책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첫 올림픽 참가에 대한 국제 여론 형성이 쉽지 않았던 상황. 그러나 이에 관한 공식 자료가 부족해 그 동안 정확한 참가 경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번에 신규 발굴된 <뉴욕타임즈> 기사는 우리나라 첫 올림픽 참가에 대한 국제 사회의 논의와 협조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난항을 ™던 올림픽 참가는 서윤복 선수의 보스턴마라톤대회 우승으로 돌파구를 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우승에 국제 사회가 크게 감동하며 '코리아의 올림픽 참가'를 적극 지원하기로 한 것.

서 선수 우승 다음 달 5월 14일 아마추어육상연맹(AAU)은 뉴욕에서 서윤복 선수 초청 오찬 모임은 갖고 IOC를 포함한 육상 관계자들의 뜻을 대대적으로 모아, 그때까지만 해도 불투명했던 육상과 축구의 ISF 가입에도 청신호를 보내주었다.

또한, 1948년 1월 생모리츠 동계올림픽대회 역시 이 모임을 통해 참가 의의을 더했으며, 이는 동계올림픽 감독이자 선수인 최용진의 오찬 참석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미간의 파트너십을 강조하는 임영신(당시 중앙여대 총장)의 연설 내용 또한 흥미롭다.

◆다음은 1947년 5월 14일자 <뉴욕타임즈>의 주요 내용

▶서윤복 선수 우승이 첫 올림픽 참가의 결정적 계기

◇최근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서윤복 선수 일행이 어제 뉴욕체육클럽에서 아마추어육상연맹AAU) 초청으로 오찬을 가졌다. 이날 모임의 목적은 한국 선수들이 1948년 런던올림픽에 태극기를 달고 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다.

◇이날 기조 연설 요지는 '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의 선의와 우정의 유대감이었다. 연설자들은 미국이 일본의 속박에서 한국을 해방함으로써 양국 간 유대가 강화되었다고 지적, 한국 스포츠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GI(주한 미군)의 기부 활동으로 이어졌음을 예로 들었다. 실제로 한국 마라톤 선수들은 GI의 도움으로 보스톤까지 8,000마일을 여행할 수 있었다.

◇마호니(Jeremiah T. Mahoney) IOC 위원은 '한국에 아직 정부가 없다는 사실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지만, 조선올림픽대책위에서 이미 IOC에 신청서를 제출했으며, 다음 주 유럽으로 가 브런디지(Avery Brundage) 미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IOC를 설득해 한국 선수들이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루이즈 임(Louise Yim, 임영신)은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은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여러분의 아들들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트로피를 가져가기 위해 우리의 아들들을 여러분의 나라로 보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에게 보여준 스포츠맨십보다 더 훌륭한 관계는 없습니다."

▶모임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연사와 참가자들

◇이날 오찬 석상에는 스포츠계 지도자, 미 육군 대표, 올림픽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선수, 한국 대표 등이 참석했다.

◇연사로는 마호니 위원과 루이즈 임 외에 1군 사령관 호지스(Courtney H. Hodges), 토르슨(Gruman C. Thorson) 준장, 매디슨 스퀘어 가든 코퍼레이션 대표 킬패트릭(John R. Kilpatrick) 준장, 유나이티드 올림픽 코니티 회장이자 전 AAU 회장 커비(Gustavus T. Kirby), 전 AAU 회장 헐버트(Murry Hulbert) 위원 등.

◇연사들은 한결같이 한국 마라톤 선수들을 축하하며, 특히 서윤복 선수의 승리가 만들어낸 놀라움을 강조, 미국과 한국의 스포츠가 양국의 우정을 공고히하는 데 기여했음을 이야기했다. 킬패트릭 장군은 "GI가 한국 마라톤 선수들의 여행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며 "그런 정신이 있는 한 미래를 낙관한다"고 말했다.

◇참석자는 한국위원회 위원장 림(Benjamin C. Limb) 대령, 미국올림픽위원회 간사 부시넬(Asa Bushnell), 뉴욕체육클럽 회장 시버먼 주니어(Frank A. Sieverman Jr.) 등. 그레임(Willard N. Greim) AAU 회장은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의 활약을 칭찬하는 전보를 보냈다.

◇오찬에는 또 1936년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과 보스턴마라톤 12위 남승용, 1908년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헤이즈(Johnny Hayes), 메트로폴리탄 AAU 육상위원회 위원장 소버(Pincus Sober), 유대인국가복지위원회 위원장 오르스타인(Charles L. Ornstein), 뉴욕체육클럽 대표 트위스크(Ted Van Twisk), 선얏센그룹 미국 사무총장 윌리엄스(Dr. Mauric Williams), 장로교 교회 평신도 대표 마츠(A. C. Marts), 한국계 미국인 우호 기금의 워드(Milton Ward) 등 참석.

◇최용진(1948년 1월 생모리츠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감독 겸 선수), 루디 현(Rudy Hyun), 뎀비(Emanuel Demby), 페리스(Ferris) 장관 등도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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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우리나라 첫 올림픽 참가 주요 일지(1945~1948)

1945년

11월 조선체육회(회장 여운형) 재건

1946년

7월 조선체육회 내에 올림픽대책위(위원장 미 군정 문교부장 겸 체육회 부회장 유억겸, 부위원장 전경무, 이상백)

12.28 조선일보 / 브런디지(미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 겸 IOC 부위원장) 3종목 이상 국제경기연맹(ISF) 가입 조건 제시 "최근 나는 조선 올림픽 참가 여부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으나 나의 생각으로는 조선은 통일된 독립 국가가 될 때까지는 올림픽대회에 참가할 시기를 고대할 수밖에 없다."

1947년

4.19 서윤복 보스턴마라톤 우승

5.13 미국 아마추어육상연맹(AAU), 서윤복 초청 오찬

5.16 조선올림픽위원회 결성

6월 육상과 축구 2종목 ISO 총회 직전 ISF 가입

6.15 IOC총회 개최

6.20 IOC 가입 승인

1948년

1.30~2.8 생모리츠동계올림픽(스피드스케이팅, 선수 3명, 임원 2명)

7.29~8.14 런던올림픽(육상, 역도, 레스링, 축구, 농구, 사이클, 복싱 등 선수 50명, 임원 17명)

8월 15일 정부 수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