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학과 교수들이 쓴 스페인 역사서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각지에서 반란이 들끓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카스티야의 왕위에 오른 엔리케 4세는 의붓동생 이사벨과 알폰소를 늘 경계했다. 뒤에서 은밀히 반란을 꾸미고 있는 권신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사벨과 알폰소를 부추겨 왕을 갈아치우려 했다. 다행히 강력한 라이벌 알폰소가 일찍 죽으면서 엔리케 4세는 한시름 놓았다. 그는 반란을 진정시키고 권신들의 불만을 무마하고자, 이사벨을 왕위 계승자로 책봉했다. 그는 이사벨로부터 '왕의 허락 없이는 결혼할 수 없다'는 서약을 받았다.
언제 내쳐질지 모를 불안 속에서 자라며 나름의 실력을 키워왔던 엔리케 4세의 약점은 사람을 보는 낮은 안목이었다. 나름대로 친했던 이사벨에 대해 전혀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사벨은 똑똑했으며 무엇보다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심가였다. 서약 따위는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이사벨은 사촌인 아라곤 왕국의 세자 페르난도와 야반도주해 결혼식을 올리며 카스티야 정가를 뒤흔들었다.
이어 엔리케 4세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자 집으로 그를 초대해 점심을 먹었다. 엔리케 4세는 이후 시름시름 앓더니 이듬해 숨졌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엔리케 4세가 비소중독으로 죽었다고 추정했다. 왕의 사후 이사벨은 카스티야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이후 이웃 아라곤 왕국과 결합해 스페인을 통일하고, 아랍 세력을 이베리아반도에서 축출했으며 콜럼버스 등을 앞세워 대항해 시대를 열어젖혔다.
최근 출간된 '케임브리지 스페인사'(글항아리)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스페인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미국 미네소타대 역사학과 교수와 명예교수인 윌리엄 D. 필립스 주니어와 칼라 란 필립스가 함께 썼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에서 펴내는 약사(略史) 시리즈의 한 편이다.
자원이 풍부하고, 온난한 기후의 스페인은 온갖 것이 뒤섞인 혼종의 문화를 지닌 유서 깊은 나라다. 기원전 8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들이 식민지를 건설하더니 그리스인, 카르타고인들이 도시 국가를 건설했고, 로마가 입성해 수백 년간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했다. 기원후 5세기 초에는 게르만족인 서고트족이 서고트 왕국을 세우며 흥했으나 8세기 초 물밀듯이 밀려오는 이슬람 세력에 멸망했다. 아랍은 독립전쟁이 끝나는 15세기까지 700여년간 이베리아반도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이 스페인 전역을 차지한 건 아니었다. 동부와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나바라 등 기독교 왕국이 건재했다. 이들은 이슬람 세력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때로는 동맹도 맺으면서 오랜 시간 이슬람과 공존했다.
이사벨 여왕이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이베리아반도에서 몰아낸 후부터 스페인의 본격적인 전성기가 시작됐다. 라틴 아메리카를 개발해 막대한 부를 쌓아 올렸고, 왕가의 근친혼을 통해 유럽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가톨릭에 대한 집착, 오스만·영국과의 전쟁, 종교 혁명 등을 거치며 '거함 스페인'은 서서히 침몰해갔다.
책은 나폴레옹의 스페인 정벌, 스페인 내전, 프랑코 정권의 부상과 오랜 독재, 민주주의의 회복, 그리고 여전히 존재하는 바스크, 카탈루냐의 분리주의 운동까지, 스페인의 근현대사까지를 아우른다.
스페인의 상승기와 하강기를 여러 인물의 명멸과 함께 극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책은 흥미롭다. 400쪽이 넘고, 만만치 않은 내용을 담고 있는 역사서지만, 다양한 인물들의 성공과 패배, 성장과 죽음, 음모와 배신 등을 생동감 있게 정리했다.
박혜경 옮김. 4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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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