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극작가 토니 쿠쉬너 원작…연기·연출 아쉬워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문화 콘텐츠의 강력한 힘은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내보이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이들이 우리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분명히 말함으로써 그 존재에 눈뜨도록 해주는 것이다.
미국의 극작가 토니 쿠쉬너가 쓴 희곡 '엔젤스 인 아메리카'가 좋은 예다.
이 작품은 1985년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동성애자와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 환자, 모르몬교 신자, 정신질환자, 흑인 등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이들을 무대로 소환했다. 특히 에이즈를 '하나님이 동성애자에게 내리는 천벌'로 치부하던 당대 사회상을 조명하면서 성소수자들이 느낀 혼란과 두려움을 간접 경험하게 한다.
1991년 미국에서 초연한 후 다양성의 가치를 담은 수작이라는 평을 들으며 퓰리처상, 토니상 등을 휩쓸었다.
그러나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하고 있는 신유청 연출의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파트 1 '밀레니엄이 다가온다'에선 좀처럼 등장인물들의 사연에 깊이 몰입하기가 어렵다.
작품은 에이즈에 걸린 백인 남자 프라이어와 그의 동성 연인인 유대인 루이스, 디나이얼 게이(동성애자임을 스스로 거부하는 동성애자)인 모르몬교도 조셉과 약물에 중독된 그의 아내 하퍼 이야기를 두 축으로 한다. 극우 변호사 로이 콘의 이야기도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한다.
등장인물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괴로워하고 서로 갈등한다. 이들에게 고통을 안기는 원인을 알아야 공감도 할 수 있을 텐데, 그러려면 1980년대 미국의 정치 상황과 종교, 인종, 실존 인물 등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런 만큼 이 작품이 2024년의 한국 관객에게도 호소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뛰어난 연출과 연기가 뒷받침돼야 한다.
그러나 캐릭터는 유기성을 잃고 단순 병치해놓은 듯하고, 스토리 전개 역시 힘이 빠진다. 2부에서 이야기가 완성된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다소 난삽하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아쉬운 건 주연배우들의 연기다. 프라이어 역의 유승호는 기존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파격 변신을 시도했으나 첫 연극인 이번 작품에서 기량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특히 하퍼와 조우하는 장면에서 선보인 드랙퀸 연기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이다.
하퍼 역으로 처음 연극에 도전한 고준희는 공연 초기보다는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관객들 사이에서 대사 처리가 불안하다는 평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언제 틀릴지 몰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공연을 봐야 하니 극에 몰입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런 와중에도 로이 콘 역의 이효정은 흔들리는 배의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닻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보수주의자, 야심가, '재미 삼아' 남자와 관계를 맺는 양성애자 등 콘이 지닌 다면적인 얼굴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프라이어 역은 유승호와 손호준이, 하퍼 역은 고준희와 정혜인이 함께 소화하고 있다.
조셉은 이효정의 아들인 이유진과 양지원이, 로이 콘은 이효정과 김주호가 연기한다.
공연은 다음 달 2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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