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노재형 기자]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로날드 아쿠냐 주니어가 지난해 메이저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40홈런-70도루를 마크했을 때 현지 언론과 해설위원 등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앞으로 나올 수 없는 기록이 나왔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30홈런-50도루가 30년도 훨씬 전인 1987년(에릭 데이비스, 37홈런-50도루)과 1990년(배리 본즈, 33홈런-52도루) 두 번 달성됐을 뿐이고, 30홈런-60도루는 그 누구도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신의 영역'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비슷한 호타준족의 상징인 40홈런-40도루도 역사적으로 1988년 호세 칸세코, 1996년 본즈, 1998년 알렉스 로드리게스, 2006년 알폰소 소리아노 등 4명에만 허락된 진기록이자 대기록으로 간주되는 상황이다.
여기에 또 다른 불가능의 세계, 만화 속의 세계에 존재할 법한 기록으로 50홈런-30도루를 떠올릴 수 있다. 아직 이 클럽을 개설한 선수는 없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이 '미개척의 세계'에 그래도 근접했던 선수를 꼽으라면 1997년 콜로라도 로키스 래리 워커다. 그는 그해 타율 0.366, 49홈런, 130타점, 33도루를 마크하며 내셔널리그 MVP에 선정됐다. BBWAA(전미야구기자협회) 투표단 28명 중 22명이 그에게 1위표를 던졌다.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대목이 바로 50홈런-30도루와 관련해 불과 홈런 1개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역대 50홈런을 넘긴 타자 중 30도루에 가장 가까이 갔던 선수는 2007년 로드리게스(54홈런, 24도루)와 1955년 윌리 메이스(51홈런, 24도루)다. '파워와 스피드 겸비'가 미덕으로 강조되는 현대야구의 관점에서 69년 전 메이스의 업적은 특별한 평가를 받을 만하다.
40홈런-70도루가 정복된 마당에 50홈런-30도루도 더 이상 '난공불락'으로 남아있기 어려울 것이란 얘기가 요즘 부쩍 많이 나돈다.
바로 LA 다저스 오타니 쇼헤이 때문이다. 오타니는 지난 8일(이하 한국시각) 밀워키 브루어스전에서 도루 2개를 추가해 시즌 20도루 고지를 밟았다. 올시즌 가장 먼저 20홈런-20도루에 오른 오타니는 생애 첫 30홈런-30도루를 넘어 역사상 첫 50홈런-30도루 정복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다저스가 91게임을 치렀으니, 오타니는 산술적으로 올시즌 50홈런, 36도루를 마크할 수 있다.
오타니는 다저스 역사에서 올스타 브레이크 이전 20홈런-20도루를 달성한 세 번째 타자다. 앞서 1979년 데이비 롭스와 2011년 맷 켐프가 전반기에 20홈런-20도루를 마크한 바 있다. 오타니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50홈런이 30도루가 좀더 멀어 보일 수밖에 없다. 남은 71경기에서 22홈런과 10도루 중 어려운 기록을 꼽으라면 누가 봐도 22홈런이기 때문이다.
오타니의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은 2021년 46개이고, 최다 도루 기록도 그해 26개다. 그래도 올시즌 50홈런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스탯캐스트 상 세부적인 타격 지표가 커리어 하이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평균 타구속도(95.5마일), 하드히트 비율(60.8%), 타석 당 배럴 비율(12.9%)이 생애 최고 수준을 유지 중이다.
파워는 두 말하면 잔소리고, 무엇보다 정확히 맞히는 타격이 뒤를 받쳐주고 있다. 오타니는 이날 현재 타율 0.314로 NL 2위에 올랐다. 1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주릭슨 프로파(0.315)와 1위를 주고받고 있다. 타석 대비 삼진 비중이 21.6%로 생애 최저치를 찍고 있다.
오타니는 기본 및 확대 스탯(standard and expanded stats) 가운데 득점(72), 홈런(28), 장타율(0.637), OPS(1.036), 장타(53), 루타(221) 등 6개 부문서 NL 1위를 달리고 있다. 도루는 NL 공동 5위다.
오타니가 이처럼 타석에서 경이적인 행보를 이어가는 원동력으로 '투수를 하지 않기 때문'이 가장 먼저 꼽힌다. 오타니는 지난해 9월 오른쪽 팔꿈치 인대재건수술을 받았다. 토미존 서저리의 재활 기간은 타자는 6~8개월, 투수는 12~18개월이다. 올시즌 타자로는 시즌 개막전부터 뛰고 있지만, 투수로는 던지지 않는다. 다만 지난 4월부터 캐치볼 등 투수로서 재활도 병행하고 있다는 점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수비를 하지 않는 지명타자에 전념하니 맘껏 배트를 휘두를 수 있다. 타자를 병행하며 선발 로테이션 관리를 한다는 건 까다롭고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라고 한다. 오타니도 이 부분을 인정했다.
이 때문에 오타니가 투수를 포기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는 언론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다.
ESPN이 지난 5월 21일 '오타니 쇼헤이가 베이브 루스처럼 투수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타자로 그렇게 훌륭한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기사를 쓴 브랫포드 두리틀 기자는 작년 토미존 서저리를 받은 오타니가 올해 타격에만 집중한 덕분에 OPS, 타율, 안타, 장타율 등 주요 공격 부문 1위를 달리며 강력한 MVP 후보로 거론되는 만큼 '투수를 포기해도 되는 상황이 아니냐'에 관한 시각을 여러 인터뷰와 기록을 통해 다뤘다.
지난 8일엔 월스트리트저널 린지 애들러 기자가 '오타니 쇼헤이가 피칭을 포기해야 하나?'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일본 출신 투타겸업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가 올해 타자로 엄청난 시즌을 보내며 다시는 마운드에 오르지 않아도 되는 행보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썼다.
하지만 오타니는 투수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 그는 지난 5월 28일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지금은 타격에만 집중하고 있어 예전 수준의 투타겸업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던지는 것은 재밌는 일"이라면서 "선발투수라면 누구든 등판 당일 긴장감을 느낀다. 어떤 면에서 그런 종류의 느낌이 그립다. 하지만 지금은 매일매일 재활이 잘 되도록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노재형 기자 jhno@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