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이종서 기자] 비 온 뒤에 땅은 더 굳어질 수 있을까.
지난 14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NC 다이노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한 장면이 고스란히 중계에 잡혔다.
3회말 2사 1루 삼성의 공격. NC 투수 이재학은 이재현과 승부 중 1S 상황에서 2구 째를 던졌다. 타자 바깥쪽으로 향했던 공. 심판 판정은 볼. 그사이 1루 주자 김지찬이 2루를 훔쳤다.
이재학은 3~4구를 모두 볼로 던졌다. 5구 째 체인지업이 스트라이크가 됐다.
강인권 NC 감독이 더그아웃에서 나왔다. 강 감독은 이재학의 2구 째가 스트라이크가 아니냐는 항의를 했다.
올해부터 KBO리그는 세계 최초로 ABS(자동 볼 판정 시스템)을 도입했다. 트래킹값으로 볼/스트라이크가 판정이 되고 심판은 '전달자' 역할이었다. 양 팀 더그아웃에는 ABS 결과를 볼 수 있는 태블릿 PC가 주어진다. 강 감독은 태블릿 PC를 보고 2구 째에 대한 어필을 한 것이다.
심판진 4명이 모여서 논의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심판진이 나눈 대화가 고스란히 중계에 잡혔다. "볼로 인식했다고 하라. 우리가 빠져나갈 길은 그것 밖에 없다", "볼이라고 '나왔다'고 해야한다. 우리가 안 깨지기 위해서는"이라는 내용이었다.
ABS값은 분명히 스트라이크였다는 뜻. 그러나 기계적 결함으로 스트라이크 판정이 제대로 전달이 안 됐다고 '입 맞추기'를 시도한 정황이었다.
4심 합의를 마친 뒤 조장이었던 이민호 심판은 "김지찬 도루를 할 때 심판에게 음성이 볼로 전달됐다. ABS 모니터 스트라이크 판정이 돼 NC 측에서 그걸 어필했다. 규정상 다음 투구가 이뤄지기 전에 어필을 해서 정정해야한다. 어필 시효가 지나갔다. 카운트대로 진행하겠다"고 했다.
NC는 억울하고 답답했다. KBO 태블릿에 판정 결과가 실시간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곧바로 항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더욱이 올 시즌 피치클락이 시범적으로 운영되면서 투수들의 투구 탬포가 이전보다 빨라졌다.
이재현은 삼진을 피할 수 있었고, 결국 볼넷을 골라냈다. NC는 역전을 허용했고, 결국 패배했다. 항의와 심판진 합의 등 긴 시간 동안 어깨가 식을 수밖에 없었던 이재학은 결국 컨디션을 찾지 못한 채 3⅓이닝 6실점으로 패배했다.
결과를 떠나 가장 공정하고 엄격해야할 심판진이 실수를 은폐하기 위해서 조작을 했다는 사실은 야구계를 충격에 빠트렸다.
KBO도 곧바로 경위 파악에 나섰다. 경기 후 경위서를 받았고, 허구연 총재 주재로 긴급 회의를 열었다. KBO는 16일 "심판 팀장 이민호 심판위원, 주심 문승훈 심판위원, 3루심 추평호 심판위원에 대해 금일 부로 직무 배제하고 절차에 따라 인사위원회에 회부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징계위원회가 아닌 인사위원회에 회부했다는 건 KBO 역시 이번 사건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는 입장. KBO는 "사안이 매우 엄중하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엄정하게 징계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KBO는 "ABS 긴급 점검 회의를 개최했으며, 주심 혹은 3루심이 스트라이크/볼 판정 수신에 혼선이 발생했을 경우, ABS 현장 요원이 적극적으로 개입 할 수 있도록 매뉴얼을 강화하기로 했다. 또한 양 팀 덕아웃에서도 주심, 3루심과 동일한 시점에 스트라이크/볼 판정을 전달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음성 수신기 장비를 배치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ABS는 도입 당시 많은 지지를 받으면서도 우려의 시선이 따랐다. 공정한 판정을 기대할 수 있지만, 기계의 오류를 걱정하기도 했다. 구장마다 ABS 존이 다르다는 목소리도 나왔고, 김태형 롯데 감독은 "믿을 수 없다"고 강도 높은 비난을 쏟아내기도 했다. 경기 중 판독 오류가 나오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사람'까지 문제를 일으켰다.
없었으면 가장 좋았을 일이다. 억울한 희생자가도 생겼다. 패배한 NC는 물론 이긴 삼성도 찝찝한 승리가 됐다. ABS 체제로 가기로 한 이상 초반에 '대형 사고'가 터진 건 오히려 다행일 수 있다. '혹시나' 하는 찜찜함을 지울 수 있는 대책이 하나 둘씩 마련되고 있다. 심판들에게는 경각심을 심어줄 사건이 됐다. '세계 최초 프로 도입'라고 자부심을 가진 ABS가 조금 더 공정하고 완벽해질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이종서 기자 bellstop@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