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최만식 기자] "술로 죽였어요."
남자 프로농구 원주 DB가 지난 14일 홈에서 수원 KT를 물리치고 정규리그 우승 파티를 벌이던 순간, 유독 각별한 감회에 빠져든 선수가 있었다. 식스맨 유현준(27)이다.
유현준은 이날 서민수 등과 함께 알토란 식스맨 활약을 했다. 4쿼터 DB가 클러치 상황에 몰렸을 때 김주성 감독의 부름을 받고 귀중한 리바운드, 어시스트 등으로 버티게 했다. 그 덕에 DB는 연장 접전 끝에 '홈 승리+우승 축포' 최상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영광의 순간 중요 역할을 했던 그는 하마터면 존재하지 못했을 선수였다. 유현준은 지난 1월 올스타전 브레이크때 DB의 커다란 '걱정거리'였다. 상무 제대 후 부상의 덫에 걸린 유현준은 경기 컨디션을 빨리 끌어올리지 못해 출전 기회가 적었던 상황이었다. 슬럼프가 길어지자 마음까지 약해진 유현준은 올스타전 휴식기에 들어가기 전, 팀에 '폭탄선언'을 했다. 은퇴를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구단 측에 따르면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하는 자신의 몸 상태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그만 둘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는 게 유현준의 속마음.
구단 측이 몇 차례에 걸쳐 설득했지만 평범한 캐릭터가 아닌 유현준의 고집은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구단이 포기할 즈음, 김 감독과 한상민 코치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라며 손을 들었다.
D-데이는 올스타전이 열린 1월 14일 저녁, 올스타전에 참가한 김 감독은 한 코치에게 먼저 유현준을 맡긴 뒤 올스타전을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합류했다. 그런데 만난 지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거늘 유현준은 이미 만취 상태였고 한 코치는 살짝 취기가 오른 정도였다. "한 코치 혼자만 소주 열댓병을 마신 것 같다"는 게 김 감독의 증언이다.
김 감독이 합류했을 때 유현준은 거의 '포섭'된 상황이었다. "너는 재능이 아깝다. 고충이 뭔지 잘 알았으니 다시 도전할 기회를 주고 싶다"는 취지로 김 감독이 '확인사살'을 하자 유현준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간 잘못했습니다. 다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이후 유현준은 추운 날씨에 입고 온 점퍼까지 벗어놓고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한 코치와의 '음주 대국'에서 도저히 버틸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이튿날 훈련장에 나온 유현준에게 "열심히 하겠습니다"는 답변을 재차 받아냈다. "술김에 'OK'했다고 말 바꿀까봐 멀쩡한 상태에서 매듭지을 필요가 있었다"며 김 감독은 웃었다.
한 코치는 유현준에게 현역 시절 아팠던 자신의 과거를 얘기했다고 한다. 2004~2005시즌 DB에서 데뷔해 4년 만에 조기 은퇴한 한 코치는 프로 생활이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2009년 서울 SK 팀매니저로 스태프 생활을 시작해 우승 전문 코치로 승격하는 등 성공한 '은퇴 후 삶'을 만들었다. 그 비결은 기회가 없다고 포기하지 않은 것이었다. 한 코치는 유현준에게 "나는 기회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바닥부터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D리그에서 뛰는 후배들을 봐라. 너는 재능도, 기회도 있는데 지금 이런 자세를 보이면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 있다"면서 "혹시 돈을 더 벌고 싶으면 더 열심히 할 생각을 해야하지 않느냐"는 조언도 했다고 한다.
숨기고 싶은 아픈 기억까지 털어놓으며 진심을 전한 한 코치의 정성에 유현준은 결국 고개를 숙였고, 우승 파티에서 함께 웃었다. 여기에 농구계 관계자들의 증언, 유현준이 '임자(한 코치)'를 잘못 만나기도 했다. 한 코치는 SK 코치 시절 현존 최강 '술꾼' 전희철 감독, 김기만 수석코치의 틈바구니에서 단련된 '숨은 강자'였다.최만식 기자 cm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