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할 정도로 용감했죠. 그래서 좌충우돌도 많이 했지만, 좋은 기회들도 잡을 수 있었어요."
돌연 은퇴를 선언한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손유희(40)는 지난 달 31일 연합뉴스와 전화 인터뷰에서 이같이 발레리나로서 무대를 누벼 온 시간을 되짚었다.
'호두까기인형'의 클라라,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오로라, '지젤'의 지젤 등 발레리나라면 모두가 꿈꾸는 작품들의 주역으로 활약해 온 손유희가 발레단을 떠난다. 오는 16∼18일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코리아 이모션 정(情)'이 고별무대다.
손유희는 "사실 은퇴를 계획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며 "선화예중의 강사 자리를 제안받으면서 고민 끝에 결정하게 됐다"고 은퇴 이유를 밝혔다.
그는 "중학생들을 가르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면 무용수들을 교육하고 싶다는 계획이 있긴 했다"며 "아이들에게 제가 쌓아온 지식과 경험을 나눠주면, 좀 더 넓고 큰 미래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며 새 출발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의 말대로 손유희는 보통 대학 졸업이나 유학 후 한 발레단에 소속돼 쭉 활동하는 발레리나들과 달리 다양한 경험을 한 편이다.
유학 시기도 빨랐다. 손유희는 1997년 13살의 어린 나이에 러시아 유학길에 나섰고, 페름 발레학교를 우등 졸업했다.
손유희는 "같이 무용하던 친구가 러시아로 유학을 가게 되면서 '나도 가고 싶다'는 마음에 따라갔다"며 "돌이켜 생각해보면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다"고 웃었다.
이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갔는데 막상 가니 그곳에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며 "한·러 사전과 얇은 회화책 하나에 의지해야 했지만, 다행히 좋은 선생님을 만나 열심히 배웠다"고 회상했다.
언어뿐 아니라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추운 날씨 등 극한의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또 어떤 음식을 먹으면 살이 찌는지도 모르던 어린 나이다 보니 식단 조절도 어려워 귀국할 때는 체중이 늘어 자신감을 잃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2001년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국립발레단 연수 단원으로 짧게 활동했다. 당시 17살의 최연소 단원이었다. 이후 배움에 대한 목마름으로 프랑스 칸 로젤라 하이타워 국제무용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고 귀국했다.
손유희는 "러시아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왔을 때 국립발레단이 초연하는 '스파르타쿠스'의 오디션이 있길래 용감하게 지원했다"며 "당시 최태지 단장님이 예쁘게 봐주셔서 무대에 설 기회들이 있었지만, '아직은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 배경을 설명했다.
2004년에는 유니버설발레단에 둥지를 틀고 안정적으로 기반을 다지는가 싶었지만, 2013년 훌쩍 미국 털사발레단으로 이적해 5년간 활동했다. 2018년에는 남편인 이현준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와 쌍둥이를 낳았고, 다시 발레리나의 몸을 만드는 게 쉽지 않을 거라던 담당 의사의 말과는 달리 당당하게 무대로 돌아왔다. 유니버설발레단에는 2020년 재입단했다.
"돌이켜보면 제가 먼저 나서서 뭔가를 하려고 하진 않았어요. 인생에 우연히 온 기회들을 따라오며 살아왔죠. 제게 무언가가 주어졌을 때 '이게 맞다'라고 생각하면 망설임 없이 바로 했던 것 같아요."
손유희는 그동안 섰던 무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역할로 털사발레단에 있을 때 공연한 '오네긴'의 타티아나 역을 꼽았다.
그는 "털사발레단에 있을 때 무용수로서 저만의 색깔을 찾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누구를 흉내 내거나 배운 걸 그대로 하는 게 아니라 저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된 느낌"이라고 했다.
이어 "'타티아나라면 이랬을 거야'가 아니라 '내가 타티아나라면'이란 생각을 하게 되면서 연기도 편안해지고, 춤도 '제 춤'을 출 수 있었다"고 뿌듯해했다.
그러면서 은퇴 전 해보지 못해 아쉬운 작품이나 역할이 있냐는 질문에는 "아쉬움은 없다"며 "조금의 아쉬움이라도 남아있었다면 무대를 못 떠났을 것"이라고 답했다.
"발레가 없는 인생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4살 때 엄마를 따라갔던 에어로빅 학원에서 춤에 눈을 뜬 이후 항상 함께였죠. 무대에서 내려와 선생님이 된다 해도 발레는 계속 저와 함께할 거예요. 시간이 지나 학교에서 은퇴한다고 해도 마찬가지고요."
aeran@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