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스포츠조선 권인하 기자]토요일에 KIA의 승리를 보러온 팬들에게 안타를 하나도 못보여 드릴 뻔했다.
노히트 노런을 당한다는 절망감이 커지던 9회말 1사 후. 팀의 막내 타자가 친 타구가 좌중간 담장을 향해 쭉쭉 뻗어 나갔다. 이날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를 찾은 1만3000여명의 팬들의 함성이 떠나갈 듯 컸다. 넘어갈 것 같은 타구는 담장 상단을 맞았다. 고구마 100개를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이 뚫리는 듯한 시원한 장타였다.
이러니 김도영을 KIA 타이거즈의 보배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김도영이 KIA라는 이름으로 첫 노히트 노런을 당할 위기에서 팀을 구했다.
김도영은 23일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KT 위즈와의 원정경기서 2번-3루수로 선발 출전해 0-4로 뒤진 9회말 마지막 타석에서 좌중간 담장을 맞히는 3루타를 쳤다. 그리고 그것이 KT 선발 윌리엄 쿠에바스에게 노히트 노런으로 끌려가던 팀의 첫 안타였다.
김도영도 쿠에바스의 공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1회말 첫 타석에서 2루수앞 땅볼로 물러났고, 3회말엔 중견수 플라이에 그쳤다. 6회말엔 풀카운트까지 접전을 펼쳤지만
143㎞의 바깥쪽 커터에 헛스윙 삼진을 당했다.
이닝이 갈수록 KIA엔 점점 노히트 노런이라는 먹구름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KIA는 해태의 이름으로 노히트 노런을 두차례 달성했고 두차례 당한 적이 있었다. 1984년 5월 5일 어린이날 해태 방수원이 무등구장에서 삼미를 상대로 8대0으로 이기며 사상 첫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었고, '국보' 선동열이 1989년 7월 6일 무등에서 삼성을 상대로 10대0 승리하며 한차례 더 노히트 노런을 했었다.
두번 당한 것도 광주 무등 경기장이었다. 1988년 4월 17일 무등에서 빙그레의 이동석에게 0대1로 당했고, 2000년 한화 송진우에게 0대6으로 패했다. 당시 포수가 NC 다이노스 강인권 감독이다.
7회말엔 3번 김선빈이 중견수 플라이로 잡혔고, 4번 최형우가 볼넷으로 나갔으나 5번 소크라테스가 우익수 플라이, 6번 이우성이 유격수앞 땅볼로 아웃됐다.
8회말에는 하위 타선이라 KIA 김종국 감독이 대타를 기용했다. 김태군 고종욱 변우혁 등 타격이 좋은 타자들을 차례로 냈지만 오히려 모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투구수가 많으면 9회말 등판하지 않을 지도 모를 일. 하지만 8회까지 던진게 103개에 불과했다. 당연히 9회말에도 쿠에바스는 마운드에 섰다.
1번 이창진이 2구째 143㎞의 커터에 우익수 플라이로 잡히면서 노히트 노런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김도영은 초구 143㎞의 높은 커터를 쳤으나 파울. 타이밍이 잘 안맞는 듯 했다. 그런데 2구째 다시 던진 142㎞의 커터가 가운데 낮게 왔고 김도영이 이를 놓치지 않고 제대로 쳤다. 치는 순간 홈런처럼 보였다. 관중들이 모두 크게 환호를 지르는 가운데 KT 좌익수 조용호가 낙구지점 펜스쪽으로 왔으나 타구는 조용호가 잡을 수 없는 펜스 위쪽에 떨어졌다. 그사이 전력질주한 김도영은 3루까지 안착. 3루타로 쿠에바스의 노히트를 깼다.
쿠에바스는 그럼에도 남아서 김선빈과 대결을 했다. 올시즌 한번도 나오지 않은 완봉승을 노리는 듯했다. 하지만 안타를 맞은 상실감이 큰 듯 제구가 흔들렸다. 초구 스트라이크 이후 볼 4개가 연속해서 들어왔다. 볼넷. 1사 1,3루가 됐고 쿠에바스의 투구수는 112개로 늘어나 있었다. 결국 교체.
KIA는 이후 바뀐 KT 마무리 김재윤을 상대로 최형우의 땅볼로 김도영이 홈을 밟아 1점을 뽑았고, 이후 소크라테스의 우중간 안타로 2사 1,3루의 추격의 찬스를 이어갔으나 이우성의 헛스윙 삼진으로 1대4로 패했다.
패배는 아쉬웠지만 노히트노런을 깬 것만으로도 팬들이 즐거워할 수 있는 경기였다. 그리고 그 히어로가 KIA의 미래인 김도영이었다는 것이 더 즐거운 사실이었다.
1차지명으로 지난해 KIA에 입단한 김도영은 올시즌 기대감이 높았으나 2경기만에 좌중족골 부상으로 인해 석달 가까이 뛰지 못하고 6월 23일에야 돌아왔다. 이날까지 63경기서 타율 2할9푼3리(256타수 75안타) 5홈런, 37타점, 20도루를 기록하고 있다. 광주=권인하 기자 indy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