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스포츠조선 정현석 기자]오후 3시55분. 두산 투수 장원준이 사복 차림으로 잠실구장에 들어섰다.
시즌 첫 콜업. 그리고 958일 만의 선발 등판.
긴장감 가득한 하루였다. 이기지 못한 1844일 세월의 더께 속에 쌓인 부담감. 통산 129승 투수도 떨림을 피할 수 없었다. 머리가 하R다. 마치 프로데뷔전을 치르는 고졸 루키 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1군에 합류한 지난 주말부터 긴장이 엄습했다. 무수한 승리 속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생소한 감정. 왜 그랬을까.
"예전이는 선발등판 다음 기회가 있었잖아요. 이번에는 안 되면 더 이상 기회가 없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더 긴장되고 그랬던 것 같아요."
게임 전 양의지가 덕아웃 한켠에 올려놓은 130승 기원 막걸리도 당사자 장원준은 보지 못했다.
1-0으로 앞선 2회 폭풍우가 지나갔다. 장단 5안타와 내야 실책으로 4점을 내주며 1-4 역전을 당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빗맞은 안타도 있었고 점수를 줄 땐 주더라도 불안하게 피칭을 해서 더 어렵게 가는 것보다 빠른 카운트 승부를 해서 어쨌든 방망이에 맞춰가지고 결과를 얻는 게 낫다고 생각을 해 최대한 공격적으로 갔어요."
투구수 50구를 넘긴 4회부터 불펜에 투수들이 등장했다.
'또 조기강판인가? 130승은 또 다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만 했던 상황.
하지만 1루측 덕아웃을 향해 셋업을 하는 좌투수의 눈에는 불펜 투수들이 보이지 않았다.
"(불펜에서 몸 푸는 투수를) 못 봤어요. 4회부터는 불펜에서 준비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만 했죠. 제가 여기서 더 고집을 피워서 더 던져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랜만에 전광판에 새긴 140㎞의 숫자 역시 보지 못했다.
좌타자 몸쪽, 우타자 바깥쪽을 파고든 투심은 장원준 부활의 키였다. "시범경기 때 이제 2군 내려갔을 때 권명철 코치님께서 투심을 던져보는 게 어떠냐고 해서 저도 예전부터 생각은 했었는데 안 했다가 다시 또 추천을 해주셔서 2군에서 선발로 던지면서 잘 먹히더라고요. 자신감도 생겼죠."
6-4로 앞선 5회를 7안타 4실점으로 막고 내려올 때 팬들은 돌아온 대투수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장원준은 이조차 보지 못했다. "보지는 않았아요. 그냥 환호성이 좀 크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죠."
안 보이는 현상은 경기 후까지 이어졌다.
방송 인터뷰 후 장원준은 후배 투수들로부터 물세례를 받았다. 인터뷰 보드 뒤에 후배들이 손에 물통을 쥔 채 하나둘씩 모였다. 아예 바가지 물을 준비한 후배도 있었다. 이들 조차 보지 못했다.
"못 봤어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봤다면 오랫동안 기억의 뇌리에 남았을 수많은 장면들. 아쉽게 놓쳤지만 무려 1844일을 기다린 1승은 또렷하게 보였다. 역대 11번째 130승이란 대기록이 남았다. 37세9개월22일 차를 맞는 베테랑 좌완 투수가 세운 최고령 기록이었다.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