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일본)=스포츠조선 나유리 기자]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일정 변경이다. MLB 사무국이 다른 참가국들을 들러리로 만들었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 야구 대회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는 MLB 사무국에서 주최한다. 2017년 대회 이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다음 대회를 열지 못했던 WBC는 올해 3월 6년만에 돌아왔다.
모처럼 야구 열기가 후끈한데, MLB 사무국이 찬물을 끼얹었다. 이해할 수 없는 준결승 일정 변경 때문이다.
16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일본과 이탈리아의 8강전을 앞두고, MLB 사무국 크리스 마리낙 최고 운영-전략 책임자는 양팀 사령탑의 경기전 기자 회견을 앞두고, 먼저 공지를 발표했다. 준결승 대진이 달라진 것에 대한 설명이었다.
MLB 사무국이 먼저 발표했던 최초의 일정표를 살펴보면, 오른쪽 하단에 '공지'가 적혀있다. "일본이 2라운드에 진출하면, 일본은 순위에 상관 없이 8강전 두번째 경기를 치른다"와 "미국이 2라운드에 진출하면, 미국은 8강전 두번째 경기를 치른다"는 내용이었다.
먼저 첫번째 공지는 조별리그 B조에 속해있던 일본은 8강전에 진출하면 도쿄에서 열리는 8강전 2경기 중 두번째날, 그러니까 15일(이하 한국시각 기준)이 아닌 16일 경기를 치른다는 뜻이다. 일본이 조 1위가 아닌, 2위였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한국 대표팀도 8강에 올라갈 경우 무조건 15일에 경기를 하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조 1위로 8강에 올라간 일본은 발표대로 16일에 이탈리아와 경기를 했다. 이 경기는 8강전 전체 4경기 중 'GAME 2'에 해당한다.
문제는 두번째 공지다. 미국은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열리는 8강전 2경기 중 두번째날, 18일과 19일 중 19일에 경기를 치르겠다고 했었다. 8강전 전체 4경기 중 'GAME 4'에 해당한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MLB 사무국이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와있는 대진표에서 이 공지 문구를 슬그머니 삭제하고, 미국의 8강전 경기를 'GAME 4'에서 'GAME 3'로 옮겨놨다.
'GAME 4'에서 'GAME 3'로 옮겨지는 것은 엄청난 변화다. 준결승에서 맞붙을 상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원래 공지대로라면, 8강전 'GAME 2' 승자와 'GAME 4' 승자가 준결승에서 맞붙는다. 일본은 이탈리아전 승리로 'GAME 2'승자가 됐다. 아직 치르지 않았지만, 미국과 베네수엘라가 'GAME 4'를 치를 예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두 팀 중 한 팀이 준결승에서 일본과 만나는 대진이다.
그런데 미국-베네수엘라전이 'GAME 3'로 옮겨지면서, 두 팀의 승자는 준결승에서 일본이 아닌 'GAME 1' 승리팀인 쿠바를 만나게 된다.
반대로 일본은 달라진 'GAME 4' 대진인 푸에르토리코-멕시코 경기의 승자와 준결승에서 맞붙는다. 이번 대회 최고 이슈팀인 미국과 일본이 준결승에서 만나는 일이 없어졌고, 무조건 결승에 진출해야만 맞대결이 성사되는 것이다.
마리낙은 현장에서 일본 취재진의 질의응답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답변은 모호했고, 설득력이 떨어졌다. 원래대로라면 'GAME 3'는 마이애미 시간으로 금요일 저녁, 'GAME 4'는 토요일 저녁에 열리는데 날짜까지 맞바꿨다. 미국은 'GAME 4'에 해당하는 토요일 저녁에 베네수엘라와 경기를 하면서, 대진만 'GAME 3'로 옮겨졌다. "현지 중계 방송사의 요청과 관객 유치 등으로 미국 경기를 마이애미 시각으로 금요일 밤이 아닌, 토요일 밤에 하기로 했다"는 마리낙의 설명은 궁색해보였다.
결국 미국에게 좋은 관중 흥행, 예정된 중계 스케줄 등은 그대로 하면서 준결승전 예상 상대만 바꾸겠다는 뜻이다. 일본 취재진이 "원래 미국이 무조건 'GAME 4'를 한다는 문구가 있지 않았나"라는 질문에 마리낙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일정표를 언제 확인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문구는 이런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사라졌다"는 이야기만 했다.
MLB 사무국이 뻔뻔한 꼼수를 쓰면서까지 미국이 준결승에서 일본을 만나는 일을 피하고 싶었다는 말밖에 안된다. 일본은 이번 WBC에서 단연 돋보이는 경기력을 갖춘 유력 우승 후보고, 미국은 현역 메이저리거들이 대거 참가한 것에 비해 기복이 있는데다 투수력이 압도적이지 않다.
국제 대회에서 이런 석연치 않은 이유로 대회 중간에 대진표를 바꾸는 경우가 대체 어디있는가. 졸지에 일본과 쿠바는 예상했던 4강전 상대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는 일본 뿐만 아니라 쿠바, 베네수엘라, 푸에르토리코, 멕시코에게도 대단한 결례다. MLB 사무국이 각 나라 야구협회에 어떻게 양해를 구했는지는 몰라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행위다.
대회 주최측의 횡포다. MLB 사무국은 WBC를 더욱 세계적인 국제 대회로 키우고 싶어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축구의 월드컵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결국 모든 것이 미국과 메이저리그로 귀결된다는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다.
다른 참가국들을 들러리로 만든 미국이 사무국의 바람대로 WBC 우승을 할 것인지는 한번 지켜봐야 하겠다.
도쿄(일본)=나유리 기자 youll@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