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 더 원팀(We are the one team)! 우리는 한 팀!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파라아이스하키 파이팅!"
8일 강원도 강릉하키센터에서 열린 '2023년 파라아이스하키 꿈나무 선수 동계 집중훈련', 아이들의 뜨거운 구호가 차가운 얼음판 위로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5년 전 평창패럴림픽, 대한민국 파라아이스하키 대표팀이 사상 첫 동메달 후 눈물을 쏟았던 스포츠 성지, 바로 그곳에서 앳된 얼굴의 윤지민(15·충남 봉황중) 김홍준(14·서울 잠신중) 홍선우(13·서울 휘경초) 김예성(11·순천 동산초) 등 '꿈나무'들이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낮은 썰매를 타고 질주했다. 이들의 스승은 바로 한민수 감독. 평창패럴림픽 동메달 레전드이자 '캡틴', 지난해 베이징패럴림픽 국가대표팀 첫 선수 출신 사령탑이 그곳에 있었다.
▶꿈나무 발굴 위해 국대 지휘봉 내려놓은 '평창 레전드'
지난해 3월 베이징패럴림픽서 주최국 중국에 져 2연속 동메달을 놓친 후 귀국길 만난 한 감독은 말했다. "국대 감독을 그만두려 한다. 내가 지금 할 일은 어린 선수를 발굴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이다." 베이징 대표팀 평균 연령은 39.2세. 2000년부터 20년 넘게 이들과 동고동락하며 기적을 써온 한 감독은 "4년 후엔 평균 연령이 44~45세가 될텐데 이대로라면 비전이 없다"고 했다.
2000년 첫 파라아이스하키팀 창단 멤버로 시작해 패럴림픽 동메달까지 일궈낸 그의 소명의식은 확고했다. 한체대 박사학위 논문 주제 또한 '파라아이스하키 활성화 방안'이다. '세대교체' '저변 확대'를 입으로만 부르짖지 않았다. 국가대표 지휘봉을 내려놓은 직후 가장 낮은 곳에 임했다. '신인선수, 꿈나무 감독'으로 어린 선수 발굴에 팔을 걷어붙였다. 평창기념재단 '반다비 캠프' '파라아이스하키 아카데미' 등 종목을 알릴 수 있는 일이라면 어디든 갔다. 비장애인, 장애인,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체험' 기회를 제공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진심과 열정은 통했다. 입소문을 타고 똘똘한 신인선수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다.
'열다섯' 지민이는 한 감독의 첫 제자이자 5년차 최고참이다. 2019년, 초등학교 5학년 때 대한장애인체육회 신인선수 캠프에서 한 감독을 만났다. 이후 인생이 바뀌었다. '친구들이 놀린다'는 얘기를 들은 한 감독은 지민이 학교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평창패럴림픽 사상 첫 동메달과 '로봇다리'를 보여줬다. '국대 신인선수' 지민이는 이후 학교에서 '스타'가 됐다. 한 감독의 번호 68번을 물려받은 지민이는 "감독님은 제 롤모델이다. 감독님처럼 훌륭한 국가대표가 되고 싶다"며 웃었다. "세 살 때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됐지만, 링크에선 신나게 달릴 수 있다. 보디체킹도 하고, 격렬한 운동이라 더 좋다"며 미소 지었다
골육종과 싸우고 있는 중학생 홍준이는 '목함지뢰 영웅' 하재헌 중사(SH공사) 소개로 한 감독을 만났다. 이후 썰매는 홍준이의 전부다. '가장 힘들 때 나를 버티게 해준 것은?'이란 질문에 홍준이는 지체없이 "하키"라고 답했다. 가장 닮고 싶은 선수 역시 "한민수 감독님"이다. 최근 종양 재발로 다시 수술대에 올라야 했을 때도 홍준이는 의연했다. 수술을 마치기가 무섭게 링크로 달려왔다. "꼭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여섯 살 때부터 야구선수를 꿈꾸던 '운동만능' 홍준이는 "일본대표팀엔 17세 고등학생이 있더라. 나도 열심히 해서 최연소 국대, 세계적인 공격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선우는 고려대 이민구 교수 소개로 한 감독을 만났다. "아빠가 시키셔서…"라고 살짝 빼더니 "그래도 아이스하키가 꽤 좋다"며 웃는다. 목표를 묻는 질문엔 어김없이 "국가대표!"를 외쳤다. 뇌병변 장애가 있는 막내 예성이는 광양 '전남 드래곤즈' 파라아이스하키 김대식 감독 소개로 올해 첫 캠프에 합류했다. 상체 근력이 뛰어나고, 어리지만 근성 있는 선수다. "중심 잡는 게 어렵지만 재미있다"며 웃었다.▶'평창 레전드' 한민수 감독과 아이들의 꿈
한 감독의 선한 영향력은 경이롭다. 현대백화점 사회복지재단이 1500만원 상당의 '꿈나무' 장비와 썰매를 후원했다. '한 감독의 오랜 파트너' 오토복코리아는 아이들의 스포츠 의족을 책임지고 있다. 한 감독은 지난 12월 '신인선수' 아이들과 '7박8일' 일본 홋카이도로 첫 전지훈련도 다녀왔다. '2010년 밴쿠버패럴림픽 은메달' 스도 사토루와의 오랜 우정이 길을 열었다. 한 감독은 "2000년 일본서 열린 워크숍에서 '동갑내기 수비수' 스도상을 보며 꿈을 키웠는데 20년 후 우리 아이들이 친구가 됐다"며 웃었다. '스도의 고향' 홋카이도 도마코마이에서 '한민수 키즈' 3명과 '스도 키즈' 7명이 첫 합동 훈련을 가졌다. 생애 첫 해외 경험, 일본 또래들과의 훈련 후 아이들의 목표의식은 더 또렷해졌다. 홍준이는 "일본 선수들은 저희보다 시작한 지 오래 돼 잘하더라.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민이 역시 "한일전에서 붙을 선수들이다. 같은 동료지만 경기장에선 적이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한 감독은 "일본보다 구력은 짧지만 양손 스킬은 우리 애들이 좋더라. 열심히 한다면 3~4년 후 국가대표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꿈나무'를 따뜻하게 그러나 강하게 키운다. "장애가 있다고 무조건 보호만 해선 안된다. 스포츠를 통해 부모 도움 없이 자립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포츠를 통해 목표의식도 확고해지고, 자존감도 높아진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해냈다는 성취감도 생긴다. 아이스하키는 단체 종목이기 때문에 선후배와 함께 하면서 규율과 예절, 헌신과 배려도 배운다"고 덧붙였다. "부모님들이 믿고 보내주시면 좋겠다. 인성, 체력, 사회성, 목표의식을 가진 좋은 선수로 잘 키워내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훈련 후 홍준이 가족이 '썰매 릴레이' 대결에 동참했다. 유명 셰프 '홍준이 아버지' 김태중씨는 뜻밖에 에이스였다. '최종주자' 홍준이와 지민이의 폭풍 질주엔 탄성이 터져나왔다. '홍준이 아버지'는 "아들이 하는 운동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 비장애인에게도 너무 재미있는 운동"이라는 후기를 전했다. "우리 홍준이가 완전 달라졌다. 어릴 때부터 운동선수를 꿈꿨던 아이가 골육종으로 다리 수술을 한 후 파라아이스하키를 통해 새 꿈을 꾸게 됐다"며 감사를 전했다. "처음엔 학교 가기도 싫어했는데 '국대 신인선수'가 된 후 친구들에게 전혀 꿀릴 게 없다. 자존감도, 자신감도 올라갔다. 이게 스포츠의 힘이다. 앞으로 홍준이가 좋은 선수로 성장해 소아암 친구들과 세상에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강릉=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