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시즌 두산 베어스 감독으로서 새로운 야구인생을 시작하는 이승엽은 20년전인 2003년, 선수로서 당시 아시아 신기록인 시즌 56호 홈런을 기록했다. 그 해 3번 타자인 이승엽의 앞에서 출루를 거듭한 삼성 라이온즈의 2번타자가 누군지 기억하는 이가 있을까. 바로 고지행이다.
제일교포 3세인 고지행은 한신 타이거즈에서 뛰었고 25세가 되던 2003년에 한화 이글스에 입단. 그 해 4월말에 트레이드로 삼성에 이적했다. 주전 2루수로서 92경기에 출전한 고지행은 타율 2할8푼1리, 4홈런, 27타점을 기록했다. 특히 후반기에는 3할이 넘은 타율로 이승엽의 앞에서 찬스를 만들었다. 현재 일본 도쿄에서 야구 교실을 운영하는 고지행은 그 시절을 뒤돌아 보면서 "아주 건방진 태도만 보였습니다. 많은 분들에게 사과하고 싶습니다"라며 미안해 했다.
인연이 생겨서 들어간 KBO리그였지만 젊었던 그는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대해 항상 불만을 입에 담고 있었다. 20년이 지나 45세가 된 고지행은 당시를 반성하면서 "그런 저를 주변의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지금 생각해 보면 감사의 말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라고 했다. 특히 이승엽에게서 받은 배려는 고지행에게 있어 각별했다.
"이승엽 선배는 대기 타석에서 언제나 투수가 어떤 공을 던질지 자세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선배는 타이밍을 잡을 능력이 굉장히 뛰어나고, 저와 기술 차이가 커서 따라하기 쉽지 않았지만 항상 친절했습니다."
이승엽은 식당에서도 언어 소통이 불편한 고지행을 위해 주문을 도와주기도 했고, 원정경기 때는 고지행을 PC방에 데려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선배(이승엽)에게 '슈퍼스타인데 일반인처럼 거리를 걷고 있어도 괜찮으세요?'라고 물어 봤더니 '아 괜찮다' 라고 하시는 모습이 멋있었습니다" 라고 고지행은 회고했다.
고지행은 2003년시즌 주전으로 뛰었지만 다음해인 2004년 현대 유니콘스에서 박종호가 FA로 오면서 자리를 잃었다. 코칭스태프는 고지행의 타격을 높게 평가해 1루수 전향을 제안했다. 그 해 삼성은 이승엽이 일본 진출을 했고, 마해영도 FA로 KIA 타이거즈로 이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지행은 거절했다. "류(중일) 코치가 펑고를 해주신다고 했는데 못 받았습니다. 기회를 주셨는데 제가 미숙하고 신인 선수와 같이 펑고를 받는걸 싫었습니다. 그 때 (배번) 65번의 통통한 선수가 기억 납니다". 그 신인선수는 이후 삼성의 주전 내야수가 되는 박석민(현 NC)이었다.
고지행은 2005년 다시 한화로 돌아갔고 퓨처스리그에서 타율 1위를 기록했지만 선수생활을 미련없이 접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지금 소년들에게 야구를 가르치고 있는 고지행. "저는 코치가 아니고 연습 파트너라고 생각해서 어린이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라며 항상 밝은 미소로 재미있게 지도하고 있었다.
젊었을 때 KBO리그에서 받은 사랑을 미래의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나누고 있는 고지행. "은퇴후 한 번도 한국에 갈 기회가 없었지만 올해는 이승엽 선배가 감독이 되신걸 계기로, 많은 분들에게 인사와 미안함을 전달하러 가려고 합니다"라며 한국행을 예고했다. <무로이 마사야 일본어판 한국프로야구 가이드북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