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노재형 기자]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가 지난 1일 LG 트윈스 김현수를 12대 회장으로 선임했다.
그런데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고 한다. 지난 주 10개 구단 전체 선수 700여명이 연봉 상위 2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투표를 진행했는데, 최다 득표를 한 선수가 회장직을 고사했다는 것이다. 결국 2~4위 득표를 한 김현수 김광현(SSG) 강민호(삼성)를 후보로 놓고 재투표한 결과 김현수가 당선됐다. '다행히' 김현수는 고사하지 않았다.
김현수는 지난 2년간 부회장을 맡아 전임 양의지 회장(두산)을 도와준 경력이 있다. 그는 취임 소감에서 "부회장을 하는 동안 (선수협)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게 됐다. 양의지가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선수들이 뽑아준 만큼 잘 해놓은 것 망치지 않도록 하겠다. 잘 뭉쳐 내실을 다지겠다"고 밝혔다. 전임 회장인 양의지가 부회장을 맡는다고도 했다.
선수협 회장은 선수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자리다. 선수들을 대표해 목소리를 내야 하는 건 희생과 봉사 정신이 필요하고 책임도 따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보수없이 활동한다는 건 둘째 문제다. 민감한 사안을 놓고 KBO 및 구단들과 부딪힐 때 전체의 의견을 모으고 전략도 짜야 한다. 5명의 부회장과 사무총장이 있고, 변호사의 도움도 받으나 회장이 받을 스트레스는 차원이 다르다.
이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연봉을 가장 많이 받는 선수가 회장을 맡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한다. 누구도 하지 않으려 하니 연봉 많이 받은 선수가 맡아 책임감을 갖고 봉사하라는 일종의 '압박'인 셈이다.
내부 문제로 2년간 회장이 공석이었던 선수협은 2019년 이대호를 10대 회장에 선임하면서 이같은 '고연봉 회장'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양의지와 김현수도 FA 계약 등 연봉으로만 총 200억원 이상을 벌어들인 재벌 선수다.
KBO리그 선수협이 엄연한 사단법인임에도 '친목 단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거대하고 잘 짜여진 조직과 싸우려면 전문성을 갖고 일에 몰두할 수 있는 회장을 뽑아야 한다.
선수협은 초대 송진우부터 김현수까지 모두 현역 선수를 회장에 앉혔다. 이전에도 프로야구를 대표할 수 있는 스타 선수가 추천과 투표를 통해 회장을 맡았다. 창립 초기에는 구단들과 한 번 싸워보겠다고 자발적으로 회장을 맡던 선수도 있었지만, 요즘에는 먼저 나서는 선수는 없다. 운동만 하기에도 고달픈데 회장 역할까지 제대로 한다는 건 웬만한 의지 갖고는 어려운 일이다.
선수협 회장은 전체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KBO와 구단들을 상대하는 자리다. 일반회사로 치면 노조위원장이다. 각종 현안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기 때문에 치밀한 논리와 법률적 이해도가 필요한 자리다. 운동을 병행하면서 머리 아픈 싸움까지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무슨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은퇴 선수'가 회장을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전임회장제'의 장점은 두 가지다. 선수들의 고충을 잘 이해할 뿐만 아니라 오직 회장 일에만 전념할 수 있다. 책임감, 업무의 효율, 집중력이 높을 수 밖에 없다. 협상 파트너인 구단과 KBO 관계자 뿐만 아니라 법률가, 공무원 등 선수 권익을 위해 사람들을 다양하게 만나 협상력과 해결 능력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선수들 사이에선 은퇴 선수에 대한 거부감이 여전히 크다고 한다. 믿지 못하는 것이다. 한 은퇴 선수는 "우리 때도 하도 말이 많아서 은퇴 선배님을 월급을 주고 모시자고 했는데, 결정권을 가진 주장들 사이에 반대가 많았다. 그런데 (회장을)하고 싶지 않은 선수들이 대다수였다. 누가 구단과 대립하려 하겠나"라며 "쉬고 있는 선배가 회장이나 사무총장을 하면 더 열심히 할 것 아닌가. 선수는 운동에만 전념하고 얼마나 좋나. 시끄러운 일도 덜 생길 것"이라고 했다.
메이저리그 선수노조는 현역 선수가 위원장을 맡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마빈 밀러 초대 위원장은 철강노조 활동을 했고, 4대 도날드 페어와 5대 마이클 와이너는 변호사였다. 현재 노조를 이끌고 있는 토니 클락 위원장이 첫 선수 출신이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뉴욕 양키스서 스타로 활약했던 그는 은퇴 후 2013년 12월부터 위원장을 맡아 최근 연임에 성공, 2027년까지 노조를 이끈다. 선수들의 신임이 두텁다.
회장 일에만 몰두할 수 있는 은퇴자가 정답이다. 노재형 기자 jhno@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