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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스토리]"이런 선수 처음 봤습니다" '리스펙'으로 모두를 감동시킨 황인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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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윤진만 기자]"솔직히 걱정됐어요."

황인범(26·FC서울)은 3월 31일 자택인 판교에서 대전으로 내려가는 길에 느꼈던 심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하지만 숨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야 했다. 만나기로 약속된 대전하나 시티즌 서포터들 앞에서 '당장 대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했다. 대전은 황인범의 고향이고, 대전하나 시티즌은 '친정팀'이다. 허락을 구할 의무는 없지만, 대전팬들이 받아들여줘야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진심이었다.

한 음식점에서 진행한 간담회에서 황인범은 팬들 앞에서 사정을 설명했다. '러시아로 돌아가면 5월에 2~3경기 밖에 못 뛴다. FIFA 특별 규정에 따라 팀을 구하면 6월말까지 몇 게임 더 뛸 수 있다. 카타르월드컵을 목표로 최상의 경기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경기를 뛸 수 있는 팀이 필요한데, K리그 아니면 미국프로축구로 가야 할 것 같다. 그중 국내 복귀를 생각하는데, 당장 대전으로 오는 건 힘들 것 같다. 에이전트가 앞으로의 커리어를 생각해 2부로 가는 건 반대한다. 관심을 보인 잉글랜드 2부팀도 안 된다고 한 이유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여기 계신 분들이 K리그의 다른 팀으로 가는 걸 반대한다면, 러시아로 돌아갈 생각이다. 여러분들의 얘기가 듣고 싶다'고 말했다.

간담회에 참석한 대전 서포터 콜리더 최해문씨는 "황인범 선수의 말이 끝나고 정적이 흘렀다"고 회상했다. 그때, 한 팬이 말문을 열었다. 이 팬은 황인범이 10년 전 유성중에 다니던 유망주 시절, 당시 대전 선수 출신인 이창엽 유성중 감독이 '황인범 지켜봐라. 얘는 나중에 국가대표될 거다'라고 한 말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황인범이 대전 프로 선수가 되고 최연소 데뷔골을 넣은 성장기를 읊었다. 그 얘기를 듣던 황인범의 눈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를 보던 팬들도 덩달아 울면서 순식간에 닭발집은 울음바다로 변했다. 최씨는 "황인범 선수가 계속 '미안하다, 죄송하다'고 했다. 그래서 '뭐가 미안하냐. 오히려 우리가 더 좋은 팀이 못 돼서 미안하다. 당장 황인범 선수를 품지 못한 건 우리의 책임도 있다'고 말해줬다. 마무리할 때 쯤 '나중에 돌아올 땐 더 좋은 클럽이 돼 있을 거니까 열심히 하다 돌아오라'고 하니, 황인범 선수가 '대전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답하면서 간담회를 마무리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6일 후 5일 서울 이적 '오피셜'이 떴다. 그 과정에서 황인범은 또 하나의 '과정'을 밟았다. 2020년부터 몸담은 카잔 구단과 황인범을 아들처럼 챙긴 레오니드 슬러츠키 카잔 감독의 동의를 구하는 일이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라 외국인 선수가 6월 30일까지 자유롭게 떠날 수 있도록 하는 FIFA의 특별 규정상 선수는 원소속팀에 통보만 하면 된다. 하지만 황인범은 서울 구단과 협상이 마무리되어 가는 중에 '슬러츠키 감독과 통화를 하겠다. 발표를 잠시만 미뤄달라'고 요구했다. 대전팬을 직접 만났듯, 슬러츠키 감독에게도 직접 의사를 전달하고 싶었다. 카잔 구단 내부가 슬러츠키 감독의 거취 문제로 시끌시끌하던 때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황인범은 슬러츠키 감독과 통화에서 사정을 설명했고, 더불어 슬러츠키 감독이 팀에 남기로 했다는 반가운 정보까지 접했다. 그 뒤 서울측에 의사를 전달했다. "가겠습니다."

서울로선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황인범과 대전의 관계, 황인범과 슬러츠키 감독과의 관계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2월말 발가락 골절상을 당해 치료차 국내로 들어온 황인범은 애초 K리그 복귀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유성한 서울 단장은 "3월초 황인범을 처음 만났을 때 영입할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선수는 카잔으로 돌아갈 생각이었고, K리그에 돌아오더라도 대전을 먼저 생각하는 눈치였다"고 돌아봤다. 포기하지 않았다. '삼고초려'의 심정으로 또 찾아갔다. '황인범이 추구하는 축구 스타일과 안익수 감독의 전술이 잘 맞는 부분, 선수와 구단의 동반 성장, 전시 상황에서 러시아로 향하는 것에 대한 리스크, K리그1의 경쟁력' 등으로 선수를 설득했다. 단기계약이 끝나는 6월 30일 이후에도 함께 미래를 공유하자는 비전도 제시했다. 유 단장은 지난달 말 부친상을 치르는 와중에도 황인범을 챙겼다. 닫혀있던 황인범도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에이전트 Ki'로 유명한 기성용과 동갑내기 절친 나상호, 대전 시절 같은 방을 썼던 김진규 코치도 설득 작업에 동참했다는 후문. 황인범은 입단 인터뷰에서 "서울의 진심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말했다.

유 단장은 "이번 이적을 진행하면서 대전팬분들과 카잔 구단에 하는 태도를 보며 황인범이 확실히 다른 선수란 걸 느꼈다. 상대를 '리스펙(존중)'하는 마음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최씨는 "황인범 선수는 정말 착해 빠졌다. 인성이 된 친구다. 예전부터 대전을 끔찍이 생각했다. 어느 선수가 재활하다 말고 팬들 만나겠다고 직접 내려오나. 완전 이적도 아니고, 우리팀 소속도 아닌데. 이런 선수는 처음이다. 이러한 케이스는 다른 팀에도 없었을 것 같다"고 했다. 황인범은 5일 서울 선수단이 적응 훈련을 하는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직접 찾았다. 안 감독이 '강원전(6일) 이후에 만나도 괜찮다'고 했지만, '직접 감독님을 뵙는 게 도리'라며 경기장을 찾아 선수들과 인사를 나눴다. 뿐만아니라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관중석에서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돌아간 것으로 전해졌다. 윤진만 기자 yoonjin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