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채빈 선수가 페달에 모터를 달았습니다. 야아∼ 기가 막힙니다. 임채빈의 페달은 이젠 정종진을 향해서 힘차게 달리고 있습니다."
지난 달 30일 광명 결승전 임채빈(25기 S1 수성 30세)의 중계를 맡은 김찬호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한껏 격양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채빈이 슈퍼특선급 정하늘(21기 동서울 31세)과의 대결에서 압도적인 수도권 선수들이 포진해 5대2의 수적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선행을 무기 삼아 독주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날 정하늘은 지난 3월 14일 또 다른 슈퍼특선급 성낙송 (21기 상남 31세) 황인혁(21기 세종 33세)이 임채빈 뒤를 차례로 추주하고도 차신을 좁히지 못하며 완패한 것을 의식한 때문인지 임채빈 뒤를 공략하는 정공법 대신 임채빈 앞에서 경기를 풀어나가는 변칙 작전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실전 경험이 부족한 신예 임채빈을 상대로 2019년 그랑프리 준우승자인 정하늘로서는 탁월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방을 윽박지르는 한 템포 빠른 선행승부 앞에서는 그 어떤 작전도 공염불에 그칠 뿐이었다. 이날 임채빈의 200m 랩타임 기록은 무려 10초 60. 지금까지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200m 선행 최고 시속으로 레이스를 이끌어 나갔고 결승선을 통과할 때도 종속이 전혀 떨어지지 않은 채 막판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 대단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한 바퀴를 더 끌고 나가도 지치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현재 경륜 랭킹 2∼4위인 황인혁 정하늘 성낙송을 선행승부로만 완파하며 도장 깨기를 이어가고 있는 임채빈의 페달은 이젠 현 경륜 챔피언 정종진(20기 김포 34세)을 정조준하고 있다. 예년 같으면 이달 말 펼쳐지는 상반기 왕중왕전에서 두 선수의 '꿈의 대결'이 성사됐겠지만 아쉽게도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사실상 대회가 물 건너간 상황이라 많은 전문가와 경륜 팬들은 머릿속 가상대결을 통해 설왕설래하고 있다.
먼저 정종진의 승리를 예상하는 쪽은 전무후무한 그랑프리 대상경륜 4연패 및 경륜 최다 50연승 대 기록자의 관록과 수도권-충청권의 든든한 아군을 이유로 든다. 경륜은 개인종목이지만 지역별로 나뉜 훈련팀 간의 연대를 통한 윈-윈 전략도 무시할 수 없다. 두 선수는 어차피 마주쳐도 결승전에 가야 맞붙을 가능성이 높은데 금요일 예선 토요일 준결승에서 경상권 선수들이 줄줄이 탈락하면 임채빈은 고립무원에 빠질 수밖에 없고 초주 자리를 못 잡은 상태에서는 천하의 임채빈도 선행 타이밍을 잡기가 어렵거나 성급히 치고 나갈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반면 임채빈이 지금까지 보여준 괴력의 선행력과 시속의 절대적 우위라면 수도권-충청권 연대를 와해시키는 게 어렵지 않다는 견해도 많다. 정종진 독주 체재 하에서는 수도권-충청권 선수들이 정종진 바라보기를 통한 경상권 선수들을 철저히 견제했지만 임채빈이 함께 출전하는 경기에서는 맹목적으로 정종진 편에 설 수 없다는 얘기다. 정종진이 2019년 그랑프리 결승에서도 우군으로 생각했던 동서울팀 정해민 정하늘 신은섭이 반기를 들자 힘겨운 승부 끝에 가까스로 4연패에 성공했듯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으로 언제든지 돌변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예상지 '경륜박사'의 박진수 팀장도 임채빈이 연대 측면에서 불리하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경륜에서 연대를 통한 상부상조는 합법적인 결과로 받아들여지지만 조력행위는 엄연히 금지되어 있다. 지금까지 정종진 앞에서 선행을 했던 선수들도 희생만을 강요당하지 않았다. 정종진의 비호 속에 본인들의 실속도 또박또박 챙겨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임채빈을 만났을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임채빈의 선행 타이밍을 뺏기 위해 본인의 성적을 포기한 채 정종진 앞에서 무작정 내달릴 수만은 없다. 자칫 무모한 선행을 한 후 하위권으로 크게 뒤처지면 조력행위에 의한 실격 처리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박 팀장은 "정종진과 임채빈이 실전에서 맞닥뜨리게 되면 수도권-충청권 선수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모색하거나 방관자에 머물 가능성이 있고 오히려 상대 견제에 능한 경상권 성낙송 박용범 (18기. 김해, 34세)의 경우는 임채빈의 뒤를 바짝 추주하면서 정종진을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