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태국)=스포츠조선 김 용 기자]김학범 감독은 철저한 '비주류'였다.
그는 선수시절 무명이었다. 태극마크는 고사하고 프로무대 조차 밟지 못했다. 실업팀 국민은행에서 은퇴한 뒤 은행원으로 일했다. 워낙 성실했던 그는 과장까지 진급했다. 하지만 축구를 놓지 못했다. 김 감독은 지도자로 다시 축구의 길을 걸었다. 특유의 성실함에 영리함을 더한 김 감독은 지도자 변신 후 승승장구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때 코치를 맡으며 이름을 알린 김 감독은 1998년 성남의 코치로 합류하며 지도자로서 기반을 닦았다. 2001~2003년 성남의 3연패에 결정적 공을 세웠던 김 감독은 2005년 꿈에 그리던 프로 감독이 됐다. 이듬 해 성남을 K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대표적인 지략가로 인정받았다. 2006년 K리그 최우수 감독으로 뽑히며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이름을 빗대 '학범슨'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김 감독의 힘은 공부였다. 2006년 명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며 국내 첫 축구박사가 됐다. 김 감독은 틈만 나면 자비로 남미와 유럽을 방문해 수준 높은 리그를 보며 전술을 익힌다. K리그에서 가장 먼저 포백 전술을 도입한 것도 김 감독이었다. 성남, 강원, 광주 등 지원이 부족한 시도민구단을 맡았지만, 특유의 지략을 앞세워 늘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다.
부단히 공부하며 실력으로 살아남았지만, 대표팀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주류라는 유리천장이 그를 가로 막았다. 기회가 찾아왔다. 김봉길 감독의 경질로 U-23 대표팀 감독직이 공석이 됐다. 김판곤 국가대표선임위원장은 다양한 후보군을 올리고 면접을 진행했다. 김 감독은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최종면접에서 대회 참가 24개국의 전력을 분석한 프리젠테이션을 했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마침내 김 감독이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첫번째 시험대는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이었다. 황의조(보르도)를 와일드카드로 발탁하며 인맥 논란에 시달리며, 시작부터 꼬였다. 설상가상으로 조편성까지 도와주지 않았다. 주최측의 실수로 두번이나 조편성이 다시 되는 촌극을 빚었다. 다행히 원안대로 대회가 진행되기로 했지만, 스케줄이 꼬였다. 연습경기 조차 치르지 못한 채 대회에 나서야 했다.
첫 경기였던 바레인전에서 6대0 대승을 거두며 기분 좋게 출발했지만, 이내 위기가 찾아왔다. 말레이시아와의 2차전에서 1대2로 패했다. 결과적으로 이 패배는 약이 됐다. 한국은 이후 확 달라진 경기력을 보이며 승승장구했다. 김 감독의 지략이 돋보였다. 플랜A였던 스리백이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자, 과감히 4-3-3으로 전환했다. 공수 모두를 잡았다. 특히 한국이 자랑하는 막강 공격진의 화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우즈베키스탄과의 8강전(4대3)에서 극적인 승리로 눈물을 흘린 김 감독은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부담스러운 베트남과의 4강전에서는 '닥공'이라는 깜짝카드로 완승을 거뒀다. 그리고 대망의 결승에서 맞이한 한일전. 지면 그간의 성과를 모두 날릴 수 있는 부담스러운 일전이었지만 황희찬 선발, 이승우 조커 카드로 극일에 성공했다. 아무도 달성하지 못한 아시안게임 2연패를 이뤘다.
짧은 준비 기간에도 불구하고 첫 시험대에서 만점의 성적표를 받은 김 감독은 롱런의 기반을 마련했다. 두번째 시험대는 2020년 아시아축구연맹(AFC) U-22 챔피언십이었다. 도쿄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대회였다.
쉬운 길은 없었다. 준비기간부터 꼬였다. 시리아와 평가전은 여권 문제로 취소됐고, 선수 선발도 여의치 않았다. 조편성은 최악이었다. 중국, 이란, 우즈베키스탄과 한조에 속했다. 김 감독은 이강인(발렌시아) 백승호(다름슈타트) 두 해외파의 차출을 시도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대회 직전 평가전마저 취소됐다.
중국과의 첫 경기에서 1대0 신승 하며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던 김 감독은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미리 준비한 길을 묵묵히 걸었다. 대회 전 부터 머릿속에 있던 로테이션 카드를 전면에 내세웠다. 매 경기 다양한 선수들을 활용한 맞춤형 전술로 이란, 우즈벡을 차례로 넘었다. 요르단과의 8강전에서는 이동경(울산)이라는 특급 조커를 내세워 극적인 2대1 승리를 얻었다. 이기면 도쿄행을 확정짓는 호주와의 4강전, 김 감독은 또 한번의 교체카드를 꺼냈고, 이번에도 멋지게 맞아떨어졌다. "호주전은 체력전이 될 것"이라고 한 김 감독은 달라진 베스트11과 적극적인 교체를 앞세워 2대0 완승을 거뒀다.
9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을 일구어낸 김 감독, 이제 도쿄올림픽 메달이라는 마지막 미션만이 남았다. 생애 가장 큰 도전이지만,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김 감독은 해법을 찾을 것이다.
방콕(태국)=김 용 기자 aweso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