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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다비 스토리]박항서 감독은 한참동안 그라운드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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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 베트남 감독은 경기 후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한참이나 그라운드를 응시한 후 그제서야 발걸음을 옮겼다.

통한의 1분이었다. 다잡았던 승점이 프리킥 한방으로 날아갔다. 베트남은 8일(한국시각)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자예드 스포츠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이라크와의 2019년 UAE아시안컵 조별리그 D조 1차전에서 후반 추가시간 아드난에 결승 프리킥을 내주며 2대3으로 역전패를 당했다.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지휘봉을 잡고 맛본 첫번째 A매치 패배였다.

10년만의 스즈키컵 우승으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는 베트남이지만, 아시안컵은 또 다른 무대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00위의 베트남은 냉정히 말해 이번 대회의 언더독이다. 16강행도 쉽지 않다. 이를 알고 있는 박 감독은 스즈키컵과는 다른 전략을 들고 나왔다. 수비에 무게를 둔 5-4-1 전술을 꺼냈다. 수비를 두텁게 한 뒤 콩푸엉-꽝하이-반둑을 활용한 역습 전략을 펼쳤다.

베트남 선수들은 초반 다소 경직된 모습이었다. 아시아 최고의 대회, 한수위의 상대가 준 부담감인 듯 했다. 이런 선수들을 깨운 것이 바로 박 감독이었다.

조용히 벤치에서 선수들을 응시하던 박 감독이 테크니컬 에어리어 끝까지 나와 선수들에게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박 감독의 이야기를 들은 선수들도 조금씩 분위기를 바꿨다. 이라크와 대등하게 싸우던 베트남은 전반 24분 행운의 선제골을 뽑아냈다. 상대의 발에 맞고 골이 들어갔다. 예상 밖의 득점에 선수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박 감독 역시 열정적인 세리머니를 펼쳤다. 이내 흥분을 가라 앉히고, 선수들에게 다가가 침착할 것을 주문했다.

11분 뒤 이라크의 동점골을 뽑았다. 박 감독은 실점 직후 머리를 감싸 안으면 아쉬워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빠르게 냉정함을 찾았다. 실망할 선수들을 다독 거리며 용기를 북돋아줬다. 전반 42분 베트남은 다시 한번 리드를 잡았다. 콩푸엉이 득점에 성공했다. 이번에는 박 감독도 트레이드 마크인 어퍼컷 세리머니를 펼치며,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전반 종료 휘슬이 울린 후, 박 감독은 라커룸으로 향하는 선수들에게 다가갔다. 일일이 손을 잡아주며,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의 말을 전했다. 후반 시작을 앞두고도 박 감독은 바빴다.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벤치 분위기를 다 잡은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후반에도 박 감독의 열정적인 지시는 계속 됐다. 하지만 선수들의 발은 갈수록 무뎌졌다. 세장의 교체카드를 모두 사용했지만 분위기는 반전되지 않았다. 결국 후반 14분 동점골에 이어 종료 직전 결승골을 내줬다. 마지막까지 냉정했던 박 감독이었지만, 물병을 발로 찰 정도로 아쉬움을 드러냈다. 결국 종료 휘슬이 울렸다. 통한의 역전패.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박 감독이라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패배였다. 선수들을 일일이 다독거려주던 박 감독도 그 아쉬움을 삭힐 시간이 필요했다. 그라운드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생각을 정리한 박 감독은 기자회견장에서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다시 한번 보여줬다. 좋은 경기를 한 선수들에게는 칭찬을, 결국 패배를 막지 못한 자신에게는 책임을 돌렸다. 이런 모습에 베트남 언론 역시 박수를 보냈다. 다음 상대는 이란. 하지만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다. 박 감독은 "우리 선수들은 베트남 정신으로 한치의 물러섬 없이 최선의 경기를 펼쳤다"며 "오늘 문제점을 잘 보완해, 도전자 입장에서 포기하지 않고 전쟁을 치르겠다"고 했다.

박 감독은 그렇게 또 한번의 '박항서 매직'을 향한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아부다비(아랍에미리트)=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