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중순까지 넥센 히어로즈 장정석 감독은 새롭게 영입한 외국인 타자 제리 샌즈의 활용법에 대해 고민을 거듭했다. 분명 선구안이나 파워, 수비력 등이 좋은 선수인데 실전에서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팀 승리를 위해서는 토종 외야수인 임병욱이나 김규민, 고종욱 또는 베테랑 이택근 등을 활용하는 게 나아 보였다. 그렇다고 어렵게 데려온 샌즈를 그냥 쉬게할 수도 없었다. '기회의 배분'이 당시의 장 감독에게는 매우 중요한 화두였다.
다행히 샌즈는 9월 22일 SK전부터 치른 11경기에서 10홈런을 몰아치는 괴력을 발휘했다. 이 무렵부터 샌즈의 타순은 3번으로 고정됐다. 뒤에 버티고 서 있는 최강의 4번타자 박병호와의 시너지 효과가 시작된 것이다. 박병호가 뒤에 있음으로 인해 샌즈는 투수들과 정면 승부를 할 기회가 많아진다. 강력한 4번 타자를 뒤에 둔 후광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단순히 타순 뒤에 있다는 점 외에도 실제 박병호는 샌즈의 무서운 각성에 큰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다. 샌즈가 홈런포를 몰아칠 무렵, 인터뷰를 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언급한 말이 있다. "타격코치와 박병호에게 (상대 투수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거나 "박병호와 대화를 많이 하면서 상대 투수들에 대해 배우고 있다"는 식의 코멘트다.
자신의 KBO리그 첫 포스트시즌이었던 지난 16일 KIA 타이거즈와의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마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샌즈는 변함없이 3번 우익수로 선발 출전해 7회 쐐기 투런 홈런을 포함해 4타수 2안타(1홈런) 4타점으로 맹활약을 펼치며 데일리 MVP로 선정되는 영예를 품에 안았다.
경기 후 기자회견장에 나온 샌즈는 또 다시 말했다. "타격 코치와 박병호가 상대 투수(김윤동)는 빠른 공이 장점이라고 말해줬다. 그래서 패스트볼이 오면 띄워 치려고 마음 먹고 있었다"는 소감을 밝혔다. 이번에도 박병호가 등장했다. 샌즈가 은연중으로 박병호에게 얼마나 큰 힘을 얻고 고마워하는 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2년간의 미국 생활을 거친 박병호는 외국인 선수들과 좀 더 편안하게 의사소통을 한다. 특히 외국인 타자 입장에서는 메이저리그 경험이 있고, KBO리그에서도 홈런왕에 여러 차례 오른 박병호에 대한 신뢰감이 두터울 수 밖에 없다. 자신도 낯선 이방인 입장을 경험했던 박병호는 그런 외국인 타자들이 더 편하게 팀에 녹아들며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도록 조언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샌즈의 각성 배경에는 이러한 박병호의 존재감이 도사리고 있다.
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