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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사나이' 황충재, 가수 데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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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의 복싱 히스토리> '진짜 사나이' 황충재, 가수 데뷔하다



한국 복싱 한 세기를 찬찬히 반추해 보면 승과 패를 주고받으며 영욕으로 점철된 수많은 복서가 뇌리를 스쳐 간다. 오늘의 주인공은 한국 복싱 현대사에서 지독한 불운에 울었던 복서들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황충재다. 78년도 방콕아시안게임 웰터급 금메달리스트이자 WBC 웰터급 1위, 동양 웰터급 챔피언으로 13차 방어에 성공한 철권이다. 그가 얼마 전 설운도 작곡의 '뻥이야'라는 곡으로 음반을 내고 가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며칠 전 그를 만났다. 먼저 황충재는 "절대로 나를 미화해서 쓰지 마라. 상처받은 아픔도 인생의 한 부분이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학사(동국대 경찰행정학과) 출신 복서 황충재와 필자는 30년 인연이지만. 난로 같은 관계다. 가까이 있으면 뜨겁고, 멀리 있으면 추워지는 그런 관계 말이다.

황충재는 58년 전남 광양 태생으로, 74년 고교 입학과 동시에 광주에 있는 호남복싱체육관에 입문한다. 황충재의 복싱 입문 동기는 국가대표 혹은 세계 챔피언이 아니라 야인시대에 나오는 김두한처럼 주먹왕이 되고 싶어서였다. 독특한 캐릭터를 지닌 복싱 지망생이었던 것이다. 김두한을 꿈꾸던 소년 황충재는 75년 결국 대형사고를 치고 구속된다. 4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황충재는 1년 유급하여 76년 복학한다. '참으로 어리석고 못난 짓이었구나'하고 자책하던 그는 깊은 참회를 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진정한 복서로 거듭난다. 76년도 전국신인대회 라이트웰터급 경기에서 세계 챔피언 유제두의 동생 유제형(남산공전)에게 첫 패배를 기록하며 성장통을 겪은 황충재는 절차탁마하며 전진해 나간다. 그러던 중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누가 말했던가. '기회는 앉아 있는 새와 같다. 날기 전에 잡아야 한다'고. 졸업반인 77년 2월 광주에서 국가대표 평가전이 벌어졌는데 마침 웰터급에 정용석이라는 복서가 펑크를 내는 바람에 황충재가 급히 대타로 출전하게 된 것이다. 상대는 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웰터급 금메달리스트이자 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도 출전한 부동의 국가대표 김주석(중앙대)이었다. 이 경기서 무명의 고교생 황충재가 네 살 위인 국가대표 간판 김주석을 좌우 연타로 맹공을 가하자 베테랑 김주석이 백기를 들고 투항한다. 그 후 영국의 계관시인 바이런의 어록처럼 '자고 일어나니 그는 이미 신데렐라가 되어 있었다'. 황충재는 태릉선수촌에 입촌하여 체계적인 훈련을 받자 잠재력이 활화산처럼 터지면서 복서로서의 입지를 탄탄하게 구축해 나가기 시작한다. 아울러 치명상을 입은 김주석이 소리소문없이 아마추어 복싱계를 떠나면서 자연스레 세대교체가 이뤄진다. 바통을 이어받은 황충재는 초고속 상승세로 전국 무대를 평정한다. 그해 제58회 전국체전 웰터급 경기에서 김명복배 금메달리스트인 강적 김재훈(서울체고)과 맞대결, 금메달을 획득하며 한국체대에 특기생으로 진학한다. 그리고 그해 4월 파키스탄에서 벌어진 아시아 청소년대회 결승에서 홈 링의 야베드를 1회에 KO 시키면서 우승을 차지한다. 이어 세계선수권과 아시안게임 웰터급의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연거푸 우승을 차지한다. 탁월한 스피드, 강한 내구성, 깔끔한 움직임, 강한 승부사 근성 등을 겸비한 황충재에겐 국내에서는 더는 적수가 없었다.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유제형(남산공전)을 1회에 KO 시킨 김수영(서울체고-동국대)을 현란한 테크닉으로 완벽하게 제압한 경기는 백미였다. 그해 12월 뉴델리아시안게임에서도 황충재는 웰터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국제적으로도 실력을 공인받는다. 특히, 준결승에서 말레이시아의 마심을 공이 울린 후 3초 만에 단 한 방에 쓰러트려 KO승을 거둔 승부는 아마복싱 비공인 세계 최단기록이다. 황충재는 곧 절차를 밟아 공인기록으로 인정받을 계획이다.

황충재는 79년 4월 프레드 파스터(필리핀)를 상대로 프로에 데뷔한다. 하지만, 한국체대가 아닌 동국대 소속이었다. 왜 그랬을까? 황충재는 78년 한국체대에 입학할 당시 선배들이 기강을 잡기 위해 신입생들을 집합시키자 항명 소동을 벌인다. 그러자 선배들은 한발 물러나 아시안게임 끝나고 보자며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후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그는 당시 동국대 3학년 황철순과 룸메이트가 되면서 동국대 편입을 건의했고, 복싱계 마당발 황철순이 역량을 발휘하여 일사천리로 진행시켜 결국 동국대로 편입했던 것이다. 동국대 2학년 황충재는 프로 데뷔 후 7경기 만에 필리핀 원정 경기에서 챔피언 단디 구즈만을 판정으로 꺾고 동양챔피언에 등극한다. 구즈만은 한국의 이만덕을 6회 KO로 잡고 정상에 올랐지만, 안방에서 황충재에게 완패하며 벨트를 푼 것이다. 황충재는 이후 불과 21개월 동안 무려 13차례나 동양 타이틀전을 치러 모두 성공했고, 그중 12차례는 KO승이었다. 유일한 판정승은 전 WBC 슈퍼라이트급 챔피언 사엔삭 무앙수린과 태국 원정에서 치른 6차 방어전이었다.

황충재는 당당히 WBC 웰터급 세계 1위, WBA 2위에 랭크된다. 당시 세계 웰터급 통합(WBA, WBC) 챔피언은 당대 최고의 '복싱 아티스트' 슈거레이 레너드(미국)였다. 그의 뒤를 이어 WBC 랭킹은 1위에 황충재, 2위에 피피노 쿠에바스, 3위에 토머스 헌스, 4위에 로베르토 듀란이 포진되어 있었다. AP통신은 레너드가 82년 2월 브르스 핀치, 5월 로저 스테포트와의 방어전이 차례로 끝나면 7월에 황충재와 대결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황충재는 복싱에 입문한 이후 최고의 하드 트레이닝으로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끌어 올린다. 당시 스파링 파트너였던 백인철이 황의 압박에 밀릴 정도였다. 하지만, 레너드 측은 미국에서 황충재의 인지도가 낮다면서 전 챔피언 쿠에바스와의 도전자 결정전 승자에게 우선권을 준다고 선포한다. 레너드라는 황금 닭을 쫓던 황충재는 멘붕에 빠지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다. 설상가상으로 도전자 결정전 카드로 선택된 쿠에바스 측은 1월 22일 라스베이거스에서 한다고 발표한 이후 3월 27일, 4월 11일, 5월 22일 등 무려 7차례에 걸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경기를 연기시키자 황충재는 정신적으로 크게 흔들린다. 이 와중에 협상의 귀재인 극동 전호연 회장이 전면에 등장하여 레너드 측과의 대결을 극적으로 관철시킨다. 기사회생이었다.

장소와 날짜만 미정인 채 황충재에게 총 7억 원의 파이트머니를 주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리고 전호연 회장은 일본으로 출장을 떠나면서 한마디 던진다. "동양타이틀을 반납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충재에게 그 어떤 경기도 치르게 해선 안 된다"고.

그동안 정신적으로 크게 시달린 황충재는 마음을 추스르며 서서히 워밍업을 시작한다. 한데 당시 황충재의 동양타이틀을 호시탐탐 노리던 인물이 있었다. 국내 웰터급 챔피언 황준석의 매니저인 동아의 김현치 회장이었다. 물론 황준석이 동양 랭킹 1위로 지명도전자격을 갖추고 있었기에 명분은 충분했다. 이런 와중에 전호연 회장 사위인 극동의 김종수 사장과 동아의 김현치 회장이 사석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김현치 회장은 김종수 사장 면전에서 황충재를 폄훼하는 말을 쏟아내며 신경을 건드린다. 천하의 황충재에게 이제 갓 신인 티를 벗은 황준석을 비교하는 것 자체에서 이미 크게 기분 상한 김종수 사장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당시 황준석은 15전 전승(6KO승)을 기록하며 알찬 퀄리티를 지니고 국내 타이틀 3차 방어에 성공하고 있었고, WBC 웰터급 1위 황충재는 22전 전승(19KO승)에 동양 웰터급 챔피언으로 14차 방어를 앞둔 시점이었다. 김현치가 흥분한 김종수에게 "황충재가 정말 이긴다고 생각하면 우리 삼백만 원씩 걸고 내기합시다" 하고 유혹의 미끼를 던지는 순간 김종수가 그만 덜컥 물어버리면서 계약이 체결된다. 82년 4월 18일 전주대결은 그렇게 탄생한다. 황충재의 트레이너였던 임현호 씨는 필자와의 만남에서 "충재는 딱 보름 훈련하고 경기를 치렀다. 몸과 마음이 붕붕 떠 있는 상태에서 훈련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난 경기를 회고했다. 그러면 김현치는 왜 승산도 희박한 황준석과 황충재의 단두대 매치를 기획했을까. 김현치의 과거 행적을 알아보면 해답이 나온다. 라이트급으로 활동했던 아마추어 시절 김현치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선수였다. 1m70의 김현치는 68년 멕시코올림픽 대표이자 라이트급 지존인 이창길의 장신(1m77)에서 내리꽂는 스트레이트에 총 맞은 노루처럼 펑펑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김현치는 이창길과의 3차례 경기에서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 참패를 당했지만,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학습효과를 체험했고 이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그리고 체득한 실전 노하우를 황준석에게 전수한다. 여기에 황충재의 방심도 커다란 일조를 했음은 물론이다. 황충재는 황준석의 주무기인 라이트훅을 경계하였지만, 첫 다운은 레프트훅이었다. 성동격서의 전법으로 나온 것이다. 경기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하고 전략과 전술을 세웠던 것이다. 한국 복싱 역사상 단 한 경기만으로 양 선수의 명암이 이토록 극명하게 갈린 임팩트 있는 승부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드라마틱한 경기였다. 하지만 패자 황충재는 의연했다. "'패자지 무언'이다. 준석이는 참 좋은 선수다. 특히 순발력이 뛰어났다. 상대를 너무 낮게 평가하고 방심한 내 불찰이다"라고 필자에게 말할 땐 고개가 숙여졌다. 필자가 생각했던 답은 적어도 '준석이 정도의 풋내기는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눈 딱 감고 잽 하나로도 충분히 요리할 수 있었다'는 모범답안(?)이었던 것이다. 황충재는 여느 복서와는 다르게 승패에 담담했고, 초연했다. 그리고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복서 황충재의 진솔한 내면이다. 이런 황충재를 장정구는 '도인'이라고 필자에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황충재와 연관된 황철순, 황준석이 모두 창원 황씨라는 점이다. 전 동양챔피언 황복수 역시 창원 황씨이고, 홍수환의 모친 황농선 여사도 창원 황씨라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현역 시절 황충재는 '봉천동 하리마우'라 불리는 건달 출신 복서가 체육관에서 버릇없는 행동을 하자 체벌을 가하면서 군기를 잡은 일화는 유명하다. '복싱은 예로 시작해서 예로 끝나는 운동'이라는 황충재의 훈계에 안하무인이던 그도 고개를 숙였다. 한국 프로 복싱사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원진체육관 복싱 듀오 김사왕, 김태식과 허물없는 친구처럼 어울리던 시절 김태식의 실제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는 스스럼없이 형님으로 대하며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보스 기질이 있던 페더급 강타자 김사왕과 생활할 때 다혈질인 그가 흉기를 들고 대들자 순간적으로 피하면서 한 방을 날려 깔끔하게 정리한 일화는 지금도 복싱인들 사이에 회자되는 무용담이다. 김사왕이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자 장례를 정성껏 치러줬던 일화는 황충재의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성품 때문인지 그의 주변엔 장정구를 비롯하여 따르는 복싱 선후배들이 차고 넘친다. 연예계 쪽으로 발을 넓히면 송기윤, 이동준, 설운도, 김흥국, 전영록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특히 여형약제하는 가수 남진은 환갑 나이에 신인가수로 데뷔한 황충재에겐 더할 수 없는 응원군이자 든든한 조력자이다. 두 사람은 매주 일요일 수서에 있는 모 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하며 가족같이 지낼 정도로 친밀하다.

얼마 전 황충재는 설운도 작곡의 '뻥이야'라는 다소 원색적인 곡을 내놓고 가요계에 데뷔했다. 황충재는 복싱에 입문할 때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임하겠다고 말한다. 그렇다. 세속의 성공은 내가 반드시 무엇을 하려고 한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노자의 도덕경에 '무사성사'란 말이 나온다. '사사로운 세속의 욕심을 버리면 오히려 성공할 수 있다'는 역발상적인 내용이다. 황충재가 존경하는 선배 남진의 히트곡 '빈잔'처럼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다는 심오한 뜻이 담긴 글귀이기도 하다. 복서 출신 신인가수 황충재가 현재의 업에 몰입하여 새로운 꿈을 '빈잔'에 가득 채울 수 있도록 빌어 봅니다.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