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게임의 성패는 결국 얼마나 부담감을 떨쳐내고 본연의 실력을 보여주느냐에 달려있다. 실력보다 심리가 더 중요해졌다. 대회 첫 날 우슈와 펜싱이 이를 입증했다.
지난 18일 개막한 제18회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은 대회 첫 날인 19일부터 메달 소식을 연이어 전했다. 남자 태권도 품새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2개의 금메달이 나왔다. 이밖에 여자 태권도 품새 단체전과 사격 혼성 10m 공기권총, 펜싱 남자 에페에서 은메달이 나왔고, 레슬링과 수영, 펜싱, 태권도 여자 품새 개인에서 귀중한 동메달이 추가됐다.
국제대회에서의 메달은 색깔에 관계없이 모두 값지고 소중하다. 선수들이 수 년간 땀 흘려 노력해 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왕이면 금빛'을 바라는 게 인지상정이다. 은메달을 따고도 펑펑 울던 예전에 비해서는 훨씬 분위기가 달라졌지만, 지금도 금메달을 목전에서 놓친 선수들은 깊은 아쉬움을 드러내곤 한다. 격차가 크다면 모를까, 간발의 차이라면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그런데 이런 경우 메달 색깔을 결정하는 건 결국 실력 보다는 심리 상태다. 경기에 어떠한 심리 상태로 임하느냐에 따라 메달 색깔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메달권과 비 메달권의 차이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대회 첫 날 펜싱과 우슈가 이런 차이를 확실히 보여줬다.
19일 남자 펜싱 에페 개인전 4강에는 두 명의 한국 선수가 올라와 있었다. '베테랑 펜서' 정진선과 리우올림픽 '할 수 있다'의 신화를 쓴 박상영이었다. 한국 펜싱 관계자 사이에서는 금빛 기대감이 컸다. 한국 선수들끼리 결승전 피스트에서 마주서는 그림이 예상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진선은 4강전에서, 박상영은 결승에서 모두 카자흐스탄의 알렉사닌 드미트리에 패했다.
이 패배에 공통점이 있다. 경기 운영이 평소의 정진선이나 박상영같지 않았다. 빨리 승부를 끝내려는 듯 서두르는 모습이 역력했다. 비록 결승전에서 박상영은 무릎 부상으로 데미지를 입었다고 하지만 이건 패배의 핵심 요인이 아니다. 선수 본인이 직접 "부상은 경기력에 영향을 미친 요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심리적으로 지고 들어간 면이 크다"고 냉철히 패인을 분석하기도 했다.
우슈 투로 남자 장권에서 아시안게임 2연패를 노리던 이하성도 결국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하면서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 케이스다. 이 경우는 아예 선수를 메달권 밖으로 내쳐버렸다. 19일 오전에 치른 투로 장권에서 11번째 주자로 나선 이하성은 경기 초반 공중 720도 회전을 한 뒤 착지하다가 중심을 잃은 끝에 결국 왼손으로 바닥을 짚고 말았다. 우슈 투로에서 이런 실수를 하면 게임 끝이다. 이후 아무리 빼어난 기술을 보여준다고 해도 거기서 생긴 감점을 만회할 수 없다. 결국 '디펜딩 챔피언'이던 이하성은 12로 추락했다.
이하성 역시 심리적 부담감을 실패 요인으로 짚었다. 경기 후 만난 이하성은 "거기서 움직이면 안되는 건데, 너무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 긴장을 했다"면서 "결국 다 내 실수"라고 크게 자책하고 있었다. 비록 중국 랭킹 1위인 순페이위안이 출전해 앞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기술의 정확성과 완성도 면에서 평소의 이하성도 뒤질 게 없었다. '평소처럼'을 유지했다면 좋은 경쟁을 해볼 만 했다. 그러나 결국 이하성은 상대가 아닌 부담감에 지고 말았다. 남은 한국 선수단의 메달레이스에도 심리적 안정과 부담심의 배제가 중요한 전략이 될 것 같다.
자카르타(인도네시아)=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