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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 in 골프]김세영의 빨간바지와 타이거우즈의 빨간티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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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은 뜨거운 색이다. 눈에 확 들어온다. 힘차고 강렬하고 직접적이다. 좌고우면과 거리가 멀다. '바로', '지금 당장' 이런 긴급한 느낌을 준다. 요즘 말로 하면 '직진'이다. 신호등의 빨간불 등 긴급한 경고의 의미로도 쓰이는 이유다. 어릴 적 동네 싸움을 하다 보면 코피가 터지면 흥분을 한다. 그처럼 붉은색은 태양, 불, 피, 혁명 등을 상징한다.

'룰이 있는 전쟁' 스포츠에서 붉은색은 뜨거운 열정의 대명사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월드컵 무대에서 태극전사들이 입는 붉은색 유니폼이다.

붉은색은 '간접적'이거나, '은근'하거나, '콜라보'적이지 못해 '촌스럽다'는 느낌을 준다. 쉽게 피로감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에게 센 느낌을 주기에 이만한 색도 없다. 프로야구 초창기 단골 우승팀이었던 해태 타이거즈의 '검빨 유니폼'(붉은색 상의, 검은색 하의)이 대표적이다. 지금 보면 촌스럽다고 손사래를 칠지 모르지만 당시 운동장에 강렬한 검빨 선수들은 등장은 상대팀 선수들에게 심리적 부담이 됐다.

'Just do it'을 모토로 했던 나이키와 붉은색은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나이키 협찬을 받았던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의 '검빨 패션'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선수 캐릭터도 정열적인데다 스폰서도 나이키. 환상적 궁합이었다. 파이널 라운드마다 착용하고 등장한 우즈의 빨간셔츠는 어느덧 그의 상징적 패션이 됐다.

하지만 우즈가 뜨거운 열정 하나로만 세계를 제패한 것은 아니다. 이면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냉철함'이 있다. 그의 아우라는 단지 장타를 펑펑 날리는 모습만이 아니었다. 불안해도 동요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강한 멘탈이 있었다. 연간 수백만 달러를 들여 정신 심리의사에게 진료를 받은 이유도 바로 이러한 멘탈 유지를 위해서였다.

한국 골프계에도 붉은색을 상징으로 하는 선수가 있다. '빨간바지의 마법사' 김세영(25)이다. 그는 과거 최종 라운드에서 빨간 바지를 입고 역전승을 거둔 이후 줄곧 마지막날 빨간 바지를 입고 나선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빨간 바지를 즐겨 입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빨간 바지를 많이 가지고 있다. 긍정적인 에너지와 자신감이 생긴다"고 빨간 바지를 예찬한다.

김세영은 9일(한국시각) 미국 위스콘신주 오나이다의 손베리 크리크 골프장에서 끝난 손베리 크리크 LPGA 클래식에서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4라운드 합계 31언더파 257타를 기록하며 2001년 3월 스탠더드 레지스터 핑에서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이 세웠던 72홀 최다인 27언더파 기록을 훌쩍 넘어섰다. 14개월 만에 찾아온 우승 소식도, LPGA 통산 7승 달성도, 우승 상금은 30만 달러(약 3억3000만원)도 그의 경이적인 스코어에 묻혔다. 영원히 기억될 역사적인 날, 김세영은 어김 없이 자신의 상징인 빨간 바지를 입고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정열의 골퍼' 김세영과 빨간색은 잘 어울린다. 작은 체구임에도 어릴 적부터 태권도로 다져진 탄탄한 몸에서 장타를 펑펑 쏟아낸다. 베짱도 두둑해 결정적인 순간 절대 물러서지 않는 리얼 승부사다. 한번 신바람이 나면 적수가 없다. 몰아치기는 이번 대회 뿐 아니었다. 2년전 JTBC파운더스 컵에서도 72홀 27언더파로 우승하며 최다 언더파 타이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김세영은 '자신에게 없던 것'을 보기 시작했다. 2015년 LPGA에 데뷔해 열정만으로 달려온 4년 세월. 삶의 권태 처럼 어느 순간 심리적 슬럼프가 찾아왔다.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살짝 방향을 잃고 말았다. 다시 자신에게 돌아가야 했다. 영상도 찾아보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고, 멘탈 트레이닝도 받았다.

효과가 있었다. 이번 대회에서 김세영의 플레이는 평소와 달랐다. 흥분하지 않았다. 파이널 라운드를 앞두고도 그저 "보기 없는 라운드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생각대로 무리하지 않고 기본에 충실한 라운드를 펼쳤다. 자신의 리듬대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그러자 특별한 위기가 없었다. 티샷은 페어웨이를 지켰고, 아이언 샷은 거의 대부분 그린에 떨어졌다. 그린이 어렵지 않았기에 무난하게 파나 버디로 마무리 됐다. 정열의 붉은색에 냉정의 푸른색이 섞인 '보랏빛' 김세영이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순간이었다.

비록 차분함이란 색을 덧입히긴 했지만 김세영의 뿌리 깊은 정체성은 당연히 붉은색이다. 그는 "지금까지 LPGA투어의 모든 우승은 빨간 바지를 입고 이뤄낸 것"이라며 "앞으로도 마지막 날에는 계속 빨간 바지를 입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