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 1위인 CJ대한통운이 회사의 주축인 택배기사들의 처우 개선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맏형 답지 않은 행보로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CJ대한통운은 지난 2015년부터 택배기사들에게 공짜로 택배 분류작업을 시켜왔다는 지적을 계속 받아 왔다. 이들 택배기사들은 CJ대한통운이 무대응으로 일관하자 지난 1월부터 전국택배연대노조(이하 택배노조)와 함께 이를 개선하가 위한 집회를 수시로 열고 있다. 이들은 집회에서 "CJ대한통운 본사가 아닌 대리점이 채용해 근로기준법을 적용 받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라는 이유로 주 52시간 근로시대에 하루 13시간에 달하는 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 등 친노동자 정책을 펴고 있는 상황에서도 박근태 CJ대한통운 대표는 6개월이 넘는 기간 이들의 주장을 일절 무시하며 내부 불만을 키우고 있는 모양새다.
때문에 이재현 CJ그룹 회장으로부터 큰 신임을 얻어 '이재현의 남자'로 통하는 박 대표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7시간 분류작업 공짜로 해야 하는 '을의 눈물'… 도의적 책임 외면하는 CJ대한통운
3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CJ대한통운 택배기사들의 배송분류 '공짜노동' 논란은 이미 지난 2015년부터 계속돼 왔다. 당시 많은 택배 기사들은 새벽 분류 작업을 위해 오전 6시에 출근해 하루 평균 4~5시간 일을 해야 했다. 배송업무가 주력인 택배기사들이지만 전날의 피로를 채 털어버리지도 못하고 강제적으로 무임으로 분류 작업에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대중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열악한 작업 환경은 3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한 것으로 전해졌다. 택배노조는 지난 1월부터 CJ대한통운을 향해 7시간 공짜노동 분류작업 해결을 포함한 '택배 재벌 적폐' 청산을 위한 교섭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지난 5월에는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7시간 공짜노동 분류작업 개선 위한 CJ대한통운 교섭 촉구'라는 글이 올라와 3만명 가까운 동의가 이어지는 등 높은 공감을 얻었다. 청원자는 "저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13시간 이상 일하고 '7시간 공짜노동 분류작업'에 강제 동원되는 택배 노동자입니다. 주당 노동시간 52시간 단축? 우리에게는 딴 세상 이야기입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7시간에 달하는 분류작업만 일찍 끝나면 해결되는데, CJ대한통운은 전혀 신경을 안씁니다. 아무 대가도 지급하지 않으면서, 그 긴 시간 군말 없이 일하라고 하네요"라며 고충을 토로했다.
CJ대한통운 측은 "공짜노동이 아니다. 택배 임금에 분류작업에 대한 인건비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다르다. 이는 예전 택배 물량이 적었을 때나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것. 당시에는 물량이 적어 하루 1시간 정도 분류 작업 해주고 일하러 나갈 수 있었는데 최근 택배물량이 폭발적인 상황에서 오전 7시30분 출근해서 오후 2~3시까지 분류작업이 이어지기에, 이에 맞는 대가가 당연히 뒤따라야한다는 주장이다.
택배 기사들의 절박한 외침에 CJ대한통운은 시종 무시와 외면으로 일관하고 있다. CJ대한통운 관계자는 "매년 택배물량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회사에서도 자동분류기 도입 등을 통해 분류강도를 줄이는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며 "당사는 집배점(대리점)과 택배 위수탁계약을 맺고 있으며 택배기사는 집배점과 계약을 맺고 있다. 따라서 교섭부분에 있어서는 당사와 직접적인 계약 관계가 없으므로 교섭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한마디로 택배기사들이 계약을 맺고 일을 하고 있는 대리점과 알아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
하지만 이처럼 모든 책임을 대리점에 떠넘기고 정작 원청인 CJ대한통운은 뒤로 '쏙' 빠지는 태도는 도의적 차원에서라도 업계 1위의 타이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을의 눈물'을 방치하는 CJ대한통운의 모습은 문재인 정부의 친노동자 정책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CJ 택배기사에게 이재현 회장의 '하고잡이'를 기대할 수 있을까?
택배노조는 CJ대한통운의 무대응에 맞서 지역별로 공짜 노동 해소 등을 촉구하며 파업을 진행 중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CJ대한통운이 택배기사들의 생존권까지 위협하는 조치를 강행해 더욱 비난을 받고 있다. 택배노조 창원성산지회가 최근 이틀간 파업을 하자 대리점은 물량을 부산으로 빼돌려 대체 배송을 한 것. 이에 민중당은 지난달 28일 경남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체 배송은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며 노동조합 자체를 와해시키려는 목적이 명백한 악질적 행위"라며 "갑질과 비인권적인 노동환경에 놓여있는 택배 기사들은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지난달 30일 택배노조는 CJ대한통운 광화문 본사 앞에서 울산, 수원, 김해 등 총 15개 지회에 소속된 택배 노동자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집회를 열었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조합원들은 "CJ대한통운 본사와 대리점들이 갈수록 커지는 택배시장 규모와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며 "물류량이 급격히 늘어난 만큼, 물류 분류를 전담하는 직원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냈다.
이처럼 올 상반기 내내 계속되고 있는 택배노조와 CJ대한통운 간의 갈등은 글로벌 5위 물류기업을 향해 나아가는 CJ대한통운의 이미지에 큰 타격일 수밖에 없다. CJ대한통운은 박근태 대표의 지휘아래 말레이시아 센추리로지스틱스, 베트남 최대 종합물류기업 제마뎁, 인도 최대 수송기업인 다슬 등의 M&A(기업인수·합병)에 성공하며 대대적인 외형적 성장을 이뤘다. 또 지난 1분기에는 분기 실적을 기준으로 사상 처음으로 2원대 매출액을 달성하는 등 실적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사업의 혈관과도 같은 택배기사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어 박근태 대표의 리더십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또한 지난해에는 노조 활동에 참가한 택배기사들의 재취업을 막는 '택배기사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는 의혹에도 휘말린 바 있어 이번 사태가 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박 대표는 '이재현의 남자'로 불릴 정도로, 이재현 회장의 신뢰를 전폭적으로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CJ가 옛 대한통운을 인수할 때 그룹의 숙원 사업이라 할 수 있는 물류사업을 맡긴 것도 이 회장의 박 대표에 대한 높은 평가에서 비롯됐다는 평가다.
그러나 택배노조와의 갈등을 좀처럼 해결하지 못하고 2년 넘게 악화되고 있는 현 상황은 박 대표의 이후 행보에 적신호로 작용할 수 있다. 외형적 확장에만 몰두한 나머지 '집안 단속'을 제대로 못했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이 같은 상황은 이재현 회장이 원하는 임직원의 모습에도 반한다는 평가다. 이 회장은 지난 5월 열린 '온리원 컨퍼런스'에서 350여 임직원들에게 "자신감을 갖고 즐겁게 일하며 최고의 성과를 내는 '하고잡이'가 돼달라"고 주문한바 있다. 하고잡이란 마음에서 스스로 우러나와 자발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로, 표준어는 아니지만 이 회장이 평소 즐겨 사용하는 말로 알려져 있다.
과연 이 하고잡이의 마음이 CJ대한통운의 옷을 입고 전국을 누비는 수많은 택배기사들에게 생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업계 관계자는 "박근태 대표는 CJ대한통운의 외형적 성장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는 듯한 인상이 강하다"며 "하지만 내부 불만을 이처럼 방치하다보면 글로벌 5위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더라도 그게 결고 탄탄하지 못할 것이란 평가가 많다"고 진단했다. 이정혁 기자 jjangg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