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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순혈주의'의 파괴, 더이상 경향이 아닌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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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민족주의와 가장 잘 결합된 스포츠다.

오죽하면 그 나라의 국기를 상징하는 유니폼을 입고 겨루는 축구 덕분에 전쟁이 줄었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다. 그 정점은 단연 월드컵이다. 사실 월드컵은 정확히 말하면 축구협회 대항전이다. 하지만 국가 대항전으로 멋지게 포장되며 세계 최고의 이벤트로 자리매김했다. 정치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것에 인색한 유럽인들도 축구장에서 만큼은 국기를 흔들고, 국가를 목청 높여 부른다.

월드컵에 나서는 대표팀은 그 나라의 자존심이었다. 실력만큼이나 혈통이 중요했다. 그 나라의 피가 섞이지 않은 선수가 들어오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최근 월드컵에서 순혈주의가 흔들리고 있다. 1990년대 월드컵에서 귀화선수들이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민자 출신 선수들도 나왔다. 기폭제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이었다. 1990년 이탈리아, 1994년 미국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한 프랑스는 다비드 트레제게(아르헨티나), 패트릭 비에이라(세네갈), 마르셀 드사이(가나) 등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이가 아프리카 알제리계 이민자 출신인 지네딘 지단이었다. 지단은 프랑스를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지단은 프랑스 사회를 흔들었던 이민자와 자국민 사이의 극심한 갈등을 넘어 이뤄낸 사회통합의 상징이었다.

이후 세계축구에서 순혈주의의 장벽은 빠르게 무너졌다. 독일이 대표적이었다.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독일은 '게르만 순혈주의'를 고수했다. 독일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선수만이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1998년 프랑스 대회 8강을 기점으로 급격히 몰락한 독일 축구계가 꺼낸 카드는 순혈주의 타파였다. 귀화선수와 이민자 후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가나계 게랄트 아사모아는 그 변화의 상징과도 같았다. 2002년 한-일 대회에서 독일 역사상 첫 흑인 월드컵 출전 선수로 기록된 그는 팀의 준우승에 일조했다. 이후 독일은 메주트 외질(터키), 자미 케디라(튀니지), 루카스 포돌스키(폴란드), 제롬 보아텡(가나) 등을 받아들이며 부활에 성공했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에서도 이같은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개최국 러시아에는 브라질 출신의 마리오 페르난데스가 있다. 브라질 대표 경험까지 있는 페르난데스는 러시아 시민권을 획득한 후 러시아 대표로 월드컵까지 나섰다. 덴마크에는 백인들 사이에서 유독 돋보이는 두 흑인 선수가 있다. 피오네 시스토와 유수프 폴센이다. 부모가 남수단 출신이고, 우간다에서 태어난 시스토는 덴마크가 자랑하는 특급 윙어다. 탄자니아계 혼혈인 폴센도 이번 대회 덴마크의 첫 골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벨기에도 탈순혈주의로 '새로운 황금세대'를 열었다.

상대적으로 순혈주의를 고수하는 아시아에도 혼혈 트렌드는 예외가 아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이고 있는 이란에는 스웨덴계 사만 고도스와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레자 구차네자드 등이 있다. 브라질 대표 대신 포르투갈 대표를 선택한 페페, 스페인의 디에고 코스타 등은 잘 알려진 귀화 선수다.

한국은 여전히 탈 순혈주의에 있어 보수적이다. 특히 축구에서 유독 그렇다. 2002년 한-일 대회를 앞두고 마시엘, 2012년 에닝요 귀화 이야기가 있었지만, 모두 무산됐다. 하지만 이미 일부 타 종목들은 순혈주의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추세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푸른 눈의 귀화선수들이 태극마크를 달았다. 국민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이런 추세라면 월드컵에서 다양한 피부색의 태극전사들을 만나는 것도 가능해보인다. 말컹-손흥민 투톱이 월드컵 무대에 설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