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조지영 기자]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게 늘 빚진 마음이었다."
역사상 단 한번, 일본 재판부를 발칵 뒤흔들었던 관부 재판 이야기를 다룬 휴먼 실화 영화 '허스토리'(민규동 감독, 수필름 제작). 7일 오후 서울 광진구 자양동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점에서 열린 '허스토리' 언론·배급 시사회를 통해 첫 공개됐다. 이날 시사회에는 관부 재판 원고단의 단장을 맡아 법정 투쟁을 이끌어 가는 문정숙 역의 김희애, 정숙의 도움으로 일본 사법부에 당당하게 맞서는 배정길 역의 김해숙, 정길과 함께 일본에 맞서는 욕쟁이 할머니 박순녀 역의 예수정, 두려움을 극복하고 과거의 상처와 담담히 마주한 할머니 서귀순 역의 문숙, 고향을 그리워하는 꽃신 할머니 이옥주 역의 이용녀, 정숙의 요청으로 관부 재판에 뛰어들게 된 재일 교포 변호사 이상일 역의 김준한, 민규동 감독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간 10명의 원고단과 13명의 변호인이 시모노세키(하관)와 부산을 오가며 일본 재판부를 상대로 23번의 재판을 진행한 실제 사건을 영화화한 '허스토리'. 일본군 피해자 관련 재판 사상 처음으로 보상 판결을 받아낸 유의미한 관부(하관-부산) 재판 사건을 그동안 감각적이고 의미 짙은 작품을 선보인 민규동 감독과 김희애, 김해숙, 예수정, 문숙, 이용녀 등 세대를 아우르는 대한민국 명배우들이 의기투합해 스크린으로 옮겨낸 작품이다. 특히 '허스토리'에서 90년대 당찬 여사장 문정숙을 연기한 김희애는 차진 사투리 연기와 자연스러운 일본어 연기는 물론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파격적인 변신으로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매 작품 명품 연기를 선보인 김해숙은 이번 작품에서 고통과 분노에 얼룩진 감정을 깊이 있게 연기해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 감탄을 자아낸다.
실제 재판 당시 원고단을 지원했던 후쿠야마 연락회의 소식지와 실존인물인 김문숙 단장의 관부 재판 기록을 통해 사실적인 역사 고증과 실존 인물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으려 많은 노력을 기울인 '허스토리'는 덤덤하지만 묵직한, 강한 울림을 전하며 보는 이들의 콧잔등을 시큰하게 만든다. 민규동 감독 특유의 따뜻한 인간애와 명품 배우들의 진한 명품 연기가 더해져 진정성 있는 휴먼 영화가 탄생한 것. 지난해 9월, '국민배우' 나문희의 명연기로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을 그려내 328만명의 관객을 사로잡은 '아이 캔 스피크'(김현석 감독)의 감동을 올해엔 김희애, 김해숙과 민규동 감독의 '허스토리'로 여운을 이어갈 전망이다.
시사회가 끝난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가장 먼저 마이크를 잡은 민규동 감독은 "90년대 초반에 실존 인물의 고백을 보고 가슴에 돌맹이를 얹고 살았다. 그래서 10년 전부터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영화화를 준비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누가 보겠냐' '힘든 영화를 왜 하느냐'라는 반대가 심했다. 그럼에도 하고 싶었던 이유는 나 혼자 잘 사는게 부끄러웠다. 사실 '허스토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시나리오 3편 정도를 썼는데 그 과정에서 증언과 기록을 보면서 전혀 몰랐던 관부 재판 기록을 보게 됐다. 큰 이야기에 작은 서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과감하게 시작하게 됐다.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한 영화를 보면 획일화된 이미지가 있다. 많은 사람이 이미 안 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 영화는 잘 모르고 있는 할머니들의 개별적인 아픔을 다루려고 했다. 한 명의 여성으로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숨기도 하고 도망가기도 했던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이어 "'왜 하필 이 영화인가?'라는 질문을 늘 받는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게 부끄러웠다. 늘 빚진 마음,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우리 영화에서도 그런 대사가 있다. '이런다고 세상이 바뀌느냐?'라는 대사도 있는데 세상이 바뀌지 않더라도 우리가 아는 것만으로 세상은 이미 바뀔 것이라고 믿는다"고 마음을 전했다.
그는 "굉장히 많이 만들어진 소재인 것 같지만 아직 많이 만들어진 상태도 아니다. 이제 시작이며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가 다뤄져야 한다. 이 영화는 법정 영화이기도 하고 여성들이 주인공인 여성 영화이기도 하다. 편안하게 보셨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김희애는 "일본어도, 부산 사투리도 해야 했다. 솔직하게 부산 사투리는 어렵게 생각을 안하고 일본어 연기를 부담스러워했다. 그런데 막상 연기해 보니 어미 처리같은게 부산 사투리가 더 어려웠다. 자면서도 부산 사투리를 녹음해 들을 정도였다. '이만하면 됐다'라며 포기할 법도 하지만 할머니들 생각해서 더 열심히 했다. 가짜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부산 사투리를 가르쳐준 선생님과 매일 지내며 배우려고 했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그는 "우리 영화는 실존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그 부분이 매력적이었고 하고 싶었다. 막상 시작하니 그 부분이 부담스러운 숙제로 다가오기도 했다. 진짜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이 어려웠다. 또 민규동 감독이 굉장히 완벽주의자다.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라서 최대한 외워서 현장에 가는데 그럴 때마다 민규동 감독이 조금씩 바꿔서 힘들기도 했다.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다"고 웃었다.
김해숙은 "사실 '허스토리'는 피해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는 생각에 겁없이 도전했다. 하지만 막상 연기를 하니 그분들의 고통을 조금도 다가갈 수 없어서 고통스러웠다. 배우로서 연기를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했다. 내 자신을 비우고 하얀 백지 상태로 연기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현장에서도 그분들의 아픔을 연기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함께한 배우들이 내려놨다고 하는데 그만큼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려고 했고 그만큼 뜨거운 장면이 나온 것 같다. 우리 영화가 남은 깊은 뜻이 있다. 아직 우리는 끝나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다시 한번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해숙은 "사건 이후 할머니들의 삶과 재판 과정 등 이번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됐다. 개인적으로 너무 부끄러웠다. 이번 기회에 많은 분이 이런 역사를 알아줬으면 좋겠다.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하신 분들도 돌아가신 분들도 있다. 아픈 상처를 가지고도 뜨거운 용기를 보인 사례다. 그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됐으면 좋겠다"고 뭉클한 소회를 전했다.
이용녀는 "그동안 위안부 피해자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아픈 역사라 피했다. 그러던 중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읽게 됐고 그 순간 더이상 피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 문제는 곧 내 문제이기도 하고 나라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작품으로 인해 사회에서도 소용돌이가 일어났으면 좋겠다. 이런 문제가 다시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문숙은 "이분들은 미투 운동의 시작이었다. 자신들의 가족, 주위분들의 비난 속에서도 밖으로 나와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지점이 너무 감사하고 우리도 그분들의 뜻을 이어가며 열심히 살겠다"고 말했다.
한편, '허스토리'는 김희애, 김해숙, 예수정, 문숙, 이용녀, 김선영, 김준한, 이유영, 이지하 등이 가세했고 '간신' '내 아내의 모든 것'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의 민규동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오는 27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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