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살아있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활약중인 태극낭자 중 맏언니 지은희(32·한화큐셀). 그에게 2018년 3월25일(현지시간)은 잊지 못할 날로 기억될 듯 하다. LPGA 진출 이후 개인 통산 4승째를 달성한 날. 홀인원과 우승이란 겹경사를 맞았다.
지은희는 26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칼즈배드의 아비아라 골프클럽(파72·6558야드)에서 열린 대회에서 4라운드 합계 16언더파 272타로 우승을 차지했다. 수확물도 풍성했다. 우승 상금 27만 달러(약 2억9천만원)에 대회 스폰서인 KIA 자동차가 무려 2대. 우승 부상인 스팅어와 14번 홀 홀인원 부상 소렌토가 굴러들어왔다.
지은희는 경기 후 현장 인터뷰에서 "샷이 좋았다. 드라이버도 정말 잘 됐고, 퍼팅도 유지가 잘 됐다"며 우승 비결을 밝혔다. 부상으로 받게된 자동차 2대에 대해서는 "정말?"이라고 놀라움을 표시한 뒤 "전혀 몰랐다"며 환하게 웃었다. 이어 "이번 우승으로 다음 대회에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지금 이 느낌을 그대로 이어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박인비(30·KB금융그룹)에 이은 올 시즌 LPGA 한국선수의 2번째 우승. 박인비는 지난주 끝난 뱅크 오프 호프 파운더스컵에서 우승하며 LPGA 투어 통산 19승을 기록했다.
시즌 초반, 유독 삼십대 왕언니들의 약진이 돋보인다. 이번 대회에서 지은희와 우승 경쟁을 펼친 김인경(30)과 이정은5(30)는 박인비와 동갑내기인 1988년생이다. 무대를 KLPGA로 넓혀도 시즌 초반 언니 열풍이 감지된다. 지난 19일 끝난 KLPGA 투어 브루나이 레이디스오픈에서 14년차 홍 란(32·삼천리)이 8년만에 우승을 신고했다.
이같은 '언니 열풍'에는 여러가지 보편적, 개별적 이유가 있다. 우선 시즌 초 변수가 있다. 겨우내 준비 과정이 제 각각인데 아무래도 경험 많은 선수가 페이스를 빠르게 끌어올리는 노하우를 가지기 쉽다. 상대적으로 체력적 부담이 덜하다는 점도 고려할 만한 요소다. 과학적 관리 시스템의 발전도 빼놓을 수 없다. 젊은 선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신체적 요소를 진화된 체력 관리 시스템과 장비 등이 메이크업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비거리 등 샷에서 크게 밀리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멘탈과 경험의 영향을 많이 받는 쇼트게임이나 퍼트에서 베테랑 선수들이 비교우위를 보일 가능성이 있다. 이유는 개개인 선수마다 제 각각이다. 중요한 사실은 유망주의 탄생 만큼 베테랑 선수들의 약진이 신선한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장타를 펑펑 날리며 쑥쑥 크는 어린 선수들에게 주눅들지 않고 그동안 필드 위에서 쌓아온 소중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제2의 도약'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빙속철인' 이승훈(32)은 지난 21일 열린 제23회 코카-콜라 체육대상에서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뒤 "올드 벗 골드(Old but Gold)"라는 소감으로 울림을 던졌다. 그 역시 박인비 김인경 이정은5 등과 같은 1988년생.
나이가 든다는 것은 소멸을 향해 가는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불꽃은 꺼지기 전에 가장 화려하게 타오른다. 국내외에서 베테랑의 참 의미를 일깨워주고 있는 서른 즈음의 태극 낭자들. 그들에게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낸다. 노장도 뜨거울 수 있음을, 끝까지 멋진 황금빛 골프 인생일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