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직진남' 신의현, 동계패럴림픽 사상 첫 금메달
지고는 못사는 승부사, 상남자 신의현이 기어이 대한민국 패럴림픽 역사를 새로 썼다. 10일 첫 종목인 바이애슬론 7.5㎞(좌식)에서 5위, 메달을 놓친 후 눈물을 쏟더니 이튿날인 11일 크로스컨트리 15km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만족하지 않았다. "아쉽다. 애국가를 울리겠다. 눈밭에 태극기를 꽂겠다"고 했다. 이어진 바이애슬론에서 사격 실수가 잇달았다. 가장 빛나는 순간은 마지막에 다가왔다. 17일, 마지막 크로스컨트리 7.5㎞ , 신의현은 "낭떠러지에서 이것 아니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마지막까지 죽을 힘을 다했다"고 했다. 결과는 대한민국 동계패럴림픽 사상 첫 금메달이었다. 2015년 8월 창성건설 장애인노르딕스키팀 창단과 함께 크로스컨트리를 시작한 지 불과 2년 7개월만에 금메달의 기적을 썼다. 신의현을 금메달로 이끈 힘은 '상남자'의 책임감, 포기하지 않는 근성이다. "동메달을 딴 후 (인터뷰에서) 애국가를 들려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비겁한 사람이 될까봐 잠이 안오더라. 그 약속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약속을 지킨 철인이 그제서야 환하게 웃었다. 스물여섯에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잃고, '왜 나를 살려냈냐'고 어머니를 향해 울부짖던 신의현은 더이상 그곳에 없었다. 동료 장애인들을 향해 "나도 했다. 그러니 여러분도 할 수 있다"는 감동의 메시지를 전했다. '패럴림픽'이 뭔지도 모른 채 장애인선수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조건 없는 지원에 나섰던 소속팀 창성건설 대표 배동현 선수단장에게 금메달을 걸어주는 장면은 뭉클했다.
2. 강릉아이스하키센터에 울려퍼진 '동메달' 애국가
대한민국 장애인아이스하키대표팀이 사상 첫 4강 진출을 확정한 날, 한 일본기자가 믹스트존에서 서광석 감독에게 물었다. "한국 장애인아이스하키 실업팀과 등록선수는 몇 명입니까? 1000명? 2000명?" 서 감독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실업팀은 강원도청팀 1개. 체전 때 출전하는 시도팀과 클럽들이 있습니다. 100명이 채 안될 텐데… 통역분이 잘 이야기해주세요."
'평창의 꿈' 하나로 달려온 17명의 전사들이 17일 이탈리아와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기적을 노래했다. 종료 3분전 장동신의 결승골로 사상 첫 동메달을 확정 짓던 순간, 강릉링크는 "대~한민국" 함성으로 뒤덮였다. 실업팀은 강원도청 단 하나, 변변한 연습 링크도 없이 전국을 떠돌아도 썰매만 탈 수만 있다면 행복했던 이들이 역사를 썼다. 1998년, 장애인아이스하키가 도입된 지 20년만에 패럴림픽 시상대에 올랐다. 낮은 썰매를 탄 채 2개의 스틱으로 '대~한민국!' 박자를 맞추더니 링크 중앙에 원을 그린 대표팀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우리나라 만세"를 한 목소리로 합창했다. 관중석의 문재인 대통령 내외,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함께 애국가를 부르며 눈물 흘렸다. 금메달보다 값진 동메달, 우리 생애 가장 아름다운 애국가였다.
3. '환상 드로샷' 오벤저스의 투혼과 눈물
휠체어컬링은 비장애인 컬링과 다르다. 스위핑, 일명 '빗자루질'이 없다. 정확한 투구의 몫은 절대적이다. 패럴림픽 내내 휠체어컬링 대표팀은 '오벤저스'라 불렸다. 리드 방민자(56), 스킵(세컨드) 서순석(47), 서드 정승원(60), 포스 차재관(46), 성도, 나이도, 지역도, 성향도 모두 제각각인 5명 '어벤저스'의 샷 정확도는 놀라웠다. 하루 8~9시간, 하루 100개가 넘는 투구를 하며 평창에서 최고의 순간을 꿈꿨다. 2010년 밴쿠버 은메달을 뛰어넘고 싶었다. '안경이모' 방민자 ,'안경삼촌' 서순석, '3초 이계인' 정승원… 재기발랄한 별명도 얻었다. 다양한 팀 출신, '아재'들이 쉴새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반상회' 원팀이 됐다. 예선전에서 72%의 샷 성공률로 전체 1위를 기록한 '홍일점' 방민자는 "좋아요!" "잘했어요"로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60세 서드' 정승원의 루틴 카드는 뭉클했다. '죽지 않을 만큼 엎드려라' '그동안 흘린 피눈물을 기억하라'는 글귀를 휠체어 손잡이에 붙인 채 매경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예선 1위로 4강에 오르며 금빛 희망을 밝혔지만, 17일, 캐나다와의 동메달결정전에서 3대5로 아쉽게 패하며 메달을 놓쳤다. 예선 11경기, 준결승까지 단 한번도 냉철함을 잃지 않던 '사나이' 백종철 감독이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은 장면은 잊지 못할 것같다.
4. 체코전 '빙판메시' 정승환의 연장 13초 결승골
'빙판 메시' 정승환(32·강원도청)은 11일 평창패럴림픽 장애인아이스하키 B조 2차전 체코전(3대2연장승)에서 짜릿한 연장 13초 결승골로 2연승을 이끌었다. '천하의 리오넬 메시'도 월드컵 징크스가 있다. 종목 불문, 에이스가 큰 경기에서 부진한 예는 수없이 많다. 부담감, 긴장감 등 자신과의 싸움에 상대의 집중 견제를 이겨내야 한다. 평창패럴림픽, 에이스의 품격이 빛났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로켓맨', 정승환의 활약은 눈부셨다. 2피리어드, 후배 이주승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했고 3피리어드 1-1 동점상황에서 직접 해결사로 나서 짜릿한 골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한국은 종료 39초를 남기고 체코에게 아찔한 동점골을 허용하며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연장 승부, 해결사는 또 한번 정승환이었다. 휘슬이 울린지 불과 13초만에 전광석화같은 회심의 원 샷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3대2, '2골 1도움'으로 짜릿한 승리를 이끈 후 정승환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 달리는 이에게도, 보는 이에게도 평생 잊지못할 이 '인생경기'가 TV로 중계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다.
5. '엄마 철인' 이도연의 위대한 완주
리우올림픽 핸드사이클 은메달리스트, 마흔일곱 살, 세 딸의 어머니인 이도연의 평창패럴림픽 도전은 장애인뿐 아니라 여성들에게 큰 영감을 불어넣었다. 노르딕스키 '엄마철인'은 18일 전경기를 완주한 후 부르튼 입술, 검게 그을린 얼굴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다들 예쁘다고 한다"고 했다. 일주일간 7종목을 뛰어냈다. "힘들지 않다. 지금도 기분 같아선 더 뛸 수 있다"더니 평창패럴림픽의 끝자락에서 2020년 도쿄하계패럴림픽, 2022년 베이징동계패럴림픽 도전을 약속했다. 동료 장애인들의 도전을 독려했다. "장애를 입었다는 이유로 도전을 하지 않는다. 도전하라고 말하고 싶다. 희망과 꿈을 갖고 나만의 행복을 찾으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긍정과 열정의 '엄마철인', 그녀의 운동행복론은 오래도록 마음에 머물렀다. "운동을 하면 오직 행복만 있다. 장애를 잊어먹고 산다. 나이도 잊어먹었다. 가끔 내가 마흔일곱 맞나할 정도다. 나이가 먹어도 무엇이든 가능하다. 하루를 살아도 좋아하는 운동을 할 수 있다면, 운동하다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평창=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