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백악관이 올린 게임 동영상이 전 세계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해당 영상은 사람이 총이나 칼에 맞아 죽거나 살인마가 살인을 저지르는 등 적나라하게 표현된 잔인한 장면을 1분 28초 동안 보여준다. 성인이 봐도 불쾌한 영상이지만, 모든 연령이 관람할 수 있도록 설정돼 있어 논란이 커지고 있다.
백악관은 지난 3월 8일 공식 유튜브 채널에 '게임 속 폭력성(Violence in Video Games)'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게임을 편집한 동영상을 게재했다. 영상에 포함된 게임은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2', '울펜슈타인: 뉴 오더',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 '폴아웃 4', '스나이퍼 엘리트', '디 이블 위딘' 등이다. 이 게임들은 모두 미국과 캐나다 게임 등급 분류 심사 기준(ESRB)에 따라 17세 이상 이용가인 'M(Mature) 등급'으로 분류돼 있다.
영상에 포함된 모든 게임이 심한 폭력, 피와 선혈, 성적인 콘텐츠 또는 욕설을 담고 있어 'M 등급'을 받은 게임이지만, 백악관은 영상을 모든 연령이 관람할 수 있도록 그대로 두고 있다. 이에 따라 해당 영상은 게재된 지 몇 시간 만에 조회 수가 만 자리를 넘어섰고, 약 일주일이 지난 3월 14일 기준 조회 수 130만 명을 돌파했다.
영상이 게재된 직후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미국 게임 업계 관계자들과 회담을 진행했다. 회담에는 ESA(엔터테인먼트 소프트웨어 협회) 마이크 갤러거(Mike Gallagher) 회장, ESRB(엔터테인먼트 소프트웨어 등급 위원회) 패트리샤 반스(Patricia Vance) 의장, 제니맥스(베데스다 모회사) 미디어 로버트 알트만(Robert A. Altman) 대표, 테이크-투 인터랙티브 스트라우스 젤닉(Strauss Zelnick) 최고 경영자 등 미국 게임 업계를 대표하는 인물들과 학부모 텔레비전 협의회(Parents Television Council, 이하 PTC) 회원들이 참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을 시작하며 해당 영상을 시청하는 시간을 가졌다. 영상이 끝난 후 곧바로 "이런 게 바로 폭력이다, 그렇지 않나"라고 질문했다. 미국 게임 업계 핵심 인물들과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유명한 PTC가 함께한 자리에서 회담을 시작하는 말로는 다소 자극적인 말이었다.
이어진 회담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특정 게임만을 모아 '게임=폭력'이라는 공식을 내세운 영상을 시청한 점과 PTC가 참석한 점으로 보아 게임이 가진 폭력성과 게임이 실제 사건에 미치는 영향 등을 논의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이번 회담은 지난 2월 14일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 이후 진행된 회담이므로, 트럼프 대통령이 총기 규제와 관련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회담을 열지 않았나 하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 미국 정치인 '게임은 폭력적' 의견 하루 이틀이 아니다
지난 2월 14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저리 스톤맨 더글라스 고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35명이 다치고 17명이 사망하는 큰 사건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 내 국민 정서는 총기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한편, 미국 총기협회(National Rifle Association, NRA)를 필두로 이를 반대하는 의견도 거세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백악관은 3월 1일 브리핑을 통해 게임 업계와 총기 사건과 관련된 회담을 진행하겠다고 예고했고, 이날 언급된 회담이 3월 8일 열린 회담이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많은 사람이 예상한 대로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 미국 정치인들처럼 '게임은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미국 정치계에서 "게임은 폭력적이다"라는 의견은 20년이 넘게 꾸준히 이어져 왔다. FBI 국장 후보로 지목됐던 조 리버먼(Joe Lieberman) 전 상원의원은 1993년 "게임들은 아이에게 고통을 주는 걸 즐기도록 가르친다"고 말했다.
대기업과 정부 부정을 잇달아 적발한 변호사 랠프 네이더(Ralph Nader)는 1999년 게임사를 '전자 아동 성추행범(electronic child molsters)'이라 빗대어 "이들 '전자 아동 성추행범'은 자제력이나 경계심이 거의 없다"며 "이들이 생산하는 끔찍한 물건은 갈수록 더 폭력적이고 음탕하게 변해 젊은이들을 아수라장과 다를 바 없는 중독으로 유혹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소년에게 폭력 게임 판매 금지' 규제안을 입법하며 폭력 게임 규제에 앞장섰던 리랜드 이(Leland Yee) 캘리포니아주 전 상원의원은 2013년 '어쌔신 크리드', '레드 데드 리뎀션', '그랜드 세프트 오토 4(GTA 4)' 등 게임 타이틀을 들고 "이게 바로 게임 업계가 가진 폭력과 돈에 대한 욕망이다"라고 말했다.
공화당 소속 라마 알렉산더(Lamar Alexander) 테네시주 상원의원은 2013년 "나는 (비디오) 게임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총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 제67대 국무장관을 역임하고 제45대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은 2005년 "게임은 아이들이 매춘부와 관계를 맺고 그들을 살해하도록 장려한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정치인들이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끊임없이 표출해 왔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2012년 12월 18일 SNS를 통해 "(비디오) 게임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미화'를 멈춰야 한다"며 "(게임이) 괴물을 만들어 낸다"고 언급한 바 있어, 이번 회담과 동영상 또한 그동안 견지했던 주장을 다시 한번 확실히 공표했다고 보는 시선도 있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총기 소유를 옹호해 왔다. 대통령 후보 시절 총기 난사 사건 대책으로 무슬림 입국 금지, 미국 내 모든 모스크 감시 등 황당한 전략을 내세우기도 했다. 올해 초 발생한 사건 후에는 '학교 교사, 교직원 전원 총기 무장'을 해법으로 제시해 질타를 받았다. 이 때문에 미국 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NRA에 굴복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청소년 폭력 게임 판매 금지' 규제안을 입법한 리랜드 전 상원의원이 총기 밀매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사례처럼, 미국 정치인들이 게임을 폭력적이라 언급한 배경에는 '민심' 혹은 다른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었던 경우가 적지 않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에 게임 업계를 '폭력적'이라 규정한 데에도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런 방침이 앞으로 미국 게임 업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림 텐더 / 글 박해수 겜툰기자(gamtoon@gamto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