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은 '이변의 땅'이다.
스포츠의 세계는 냉정하다. 땀과 재능의 무게로 승패가 갈린다. 약육강식의 세계이기도 하다. 강자와 약자의 경계도 뚜렷하다. 그러나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은 조금 다른 무대인 듯 하다. 경계가 희미하다. 전설과 최고수들도 땅에 떨어진다. 그 자리를 '예상 밖 선수'들이 꿰차기도 한다. 올림픽이기에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반전'이다.
지난 17일 강릉 아이스 아레나에서 열린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1500m. '괴물' 최민정(성남시청)이 금메달을 획득했지만, 아쉬움도 있었다. '우승 후보' 심석희(한국체대)가 예선에서 떨어졌다. 미끄러져 넘어진 탓이다. 이변이었다.
남자 1000m에서도 비슷한 그림이 나왔다. 세계랭킹 1위 황대헌(부흥고)과 1500m 우승자 임효준(한국체대)이 고배를 마셨다. 황대헌은 준준결선에서 실격됐다. 임효준은 결선 A에서 넘어졌다. 2014년 소치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샤를 아믈랭(캐나다)도 실격됐다. 최고수들이 휘청거리는 틈에 금메달을 손에 넣은 이는 사무엘 지라드(캐나다). 그는 1500m 랭킹 8위로 '순위권 밖 선수'였다. 결선 A서 임효준 서이라가 리우 샤오린 산도르(헝가리)에 걸려 쓰러지는 덕을 봤다.
속출하는 강자들의 충격적인 탈락과 반전 선수의 등장. 쇼트트랙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21세기 최고의 선수라 불리던 '루지 전설' 펠릭스 로흐(독일)은 빈 손으로 돌아갔다. 올림픽 3연패를 노렸던 로흐는 루지 최종 4차 시기에서 주행 실수를 범해 5위에 그쳤다. 극악의 난도를 자랑하는 평창 슬라이딩센터 9번 코스에 당했다.
윤성빈(강원도청)에게 스켈레톤 왕좌를 빼앗긴 '독재자' 마르틴스 두쿠르스(라트비아)도 쓴 잔을 마셨다. 그는 2009~2010시즌부터 2016~2017시즌까지 국제봅슬레이스켈레톤경기연맹(IBSF) 월드컵 8연패를 달성했던 전설적인 인물. 그러나 평창올림픽은 녹록지 않았다. 두쿠르스는 4위에 머물렀다.
'빙속 장거리 황제' 스벤 크라머(네덜란드)도 당했다.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만m에서 제대로 체면을 구겼다. 6위에 그쳤다. 종목별 세계선수권과 월드컵 1만m 5회, 종합세계선수권서 같은 종목 10회 우승에 빛나는 크라머는 기대 이하의 경기력으로 고개를 떨궜다.
반대로 '깜짝 메달'의 주인공들도 등장하고 있다. 에스터 레데츠카(체코)가 대표적이다. 레데츠카는 17일 열린 알파인스키 여자 슈퍼대회전 우승을 차지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는 알파인스키 월드컵 여자부 68위 선수. '살아있는 스키 전설' 린지 본(미국)은 유력한 우승후보였으나, 6위에 그쳤다. 레데츠카는 우승 후 "뭔가 잘못된 줄 알았다"고 얼떨떨해 했다.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기대주 김민석(성남시청)도 '사고'를 쳤다. 김민석은 지난 13일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500m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시아선수 최초의 동계올림픽 1500m 메달이다. 김민석은 지난해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 1500m와 팀추월 '2관왕'에 올랐지만, 세계무대에선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주자다. 김민석의 올 시즌 1500m 세계랭킹은 14위다. 나이는 불과 19세. 그의 동메달이 더 놀라운 이유다.
강릉=임정택 기자 lim1st@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