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시크했다.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정 현은 격하게 환호하지 않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으로 꺾은 '우상' 조코비치와 악수를 나눴다.
라켓을 툭 던진 그는 터벅터벅 코트를 가로질러 부모님과 지도자가 앉아 있는 좌석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
서양 관중의 눈에는 다소 생소해 보이는 장면. 최고의 순간, 그에게 중요한 건 오늘의 감사와 내일을 향한 준비였다. 생애 최고의 현재를 있게 해준 고마운 분들에 대한 감사, 그리고 이틀 후 있을 8강전을 최고의 순간으로 업데이트 하겠다는 의지만이 가득했다.
조코비치를 향한 현지의 응원은 경기 후 정 현을 향한 환호로 바뀌었다. 퇴장하는 정 현에게 사인을 요구했고 기립박수로 축하를 보냈다.
80% 조코비치 승리. 경기 전 현지 예상이었다.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다. 현지에서는 비웃듯 조코비치의 승리를 예상했다. 압도적 분위기 속에서의 외로운 싸움. 분위기를 뒤집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최고의 무대인 호주오픈, 처음으로 오른 메이저 16강전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2년전 완패를 안긴 전 세계랭킹 1위 노박 조코비치였으니 말이다.
그는 경기를 마친 뒤 관중들을 향한 온코트 인터뷰에서도 시종일관 여유가 넘치는 태도로 일관했다. '조코비치의 코너샷을 어떻게 다 받아냈느냐'는 질문에 영어로 "조코비치가 우상이라 어릴 때부터 따라했다"는 재치 넘치는 답변으로 환호를 유발했다. 긴장됐던 순간에 대한 질문에도 "다음 세트가 있고, 시간이 있다. 내가 더 젊지 않느냐"며 여유롭게 받아쳤다. 테니스 샌드그렌(미국)과의 8강전에 대해서도 "잠을 푹 자고 수요일에 대비할 것"이라며 담담하게 이야기 했다. 긴장도 흥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위트가 넘쳤고, 이 시간 이후 무엇을 해야하는 지에 대한 목표 의식만이 또렷하게 전달됐다. 퇴장하는 정 현에게 중계 카메라가 다가가 렌즈에 사인을 요청했다. 펜을 집어든 정 현은 거침 없이 써내려갔다. '보고 있나?'
그는 한국팬들에게 한마디 하라는 말에 "늦은 시간까지 응원해주셔서 감사하다. 경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수요일에 더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다"고 약속한 뒤 코트를 떠났다. 한국 테니스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쓴 정 현. 그는 아직 배가 고프다.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