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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靑소년運동]'코치'여민지, 파주축구소녀들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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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여기 모두 축구가 좋아서 온 거죠?"

'여자축구 국가대표' 여민지(24·스포츠토토)의 첫 마디에 운동장에 모인 소녀들이 "네에!" 한목소리로 우렁차게 답했다. '국가대표' 언니를 바라보는 어린 눈망울들이 초롱초롱했다.

14일 오후 4시30분, 경기도 파주 운정맑은물체육공원에 '파주 여자어린이FC' 21명의 여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대한축구협회가 운영하는 파주 여자어린이FC는 대한체육회가 주관하는 1000개의 여학생 스포츠교실 중 하나다. 대한체육회는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지원을 받아 15개 종목단체와 함께 여학생 체육 활성화에 나섰다. 2015년부터 3년째, 매주 화요일, 목요일이면 파주의 여자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모여 공을 찬다. 선수의 꿈을 꾸는 아이들도 생겼다. 한겨울 그라운드, 2010년 '17세 이하 월드컵 우승 신화' 여민지의 방문 소식에 축구소녀들은 한껏 들떴다. 체감온도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칼바람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파주의 '열혈 사커맘'들도 까치발을 든 채 딸들의 축구를 응원했다.

▶파주 축구소녀들, 여민지의 첫 제자가 되다

2010년 국제축구연맹(FIFA) 17세 이하 여자월드컵 우승을 이끌며 득점왕, MVP 등 3관왕에 오른 여민지는 한국 여자축구 대표 스타플레이어다. 누구보다 강인한 정신력을 갖춘 선수다. 2번의 십자인대 파열도 그녀의 꿈을 막아서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공부하는 선수다. 명서초-함성중 시절 꼬박꼬박 써온 축구일지로 '일기가 나를 키웠어요'라는 책도 냈다. 시즌 종료 직후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6일까지 진행된 대한축구협회(KFA) C급 지도자 자격증 코스를 밟았다. WK리그 각팀의 지원자가 미달되면서 '최연소' 여민지에게 기회가 돌아왔다.

열흘간의 지도자 교육을 마친 여민지는 '여자축구 유소녀 클럽' 재능나눔 제안에 반색했다. "마침 C코스 수업에서 배운 것들을 아이들과 나눌 좋은 기회"라며 웃었다. 한국여자축구연맹, 소속팀 스포츠토토의 지원속에 구미에서 파주까지 KTX를 타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파워포인트로 직접 '재능나눔' 수업 프로그램을 짰다. 타이머와 휘슬도 꼼꼼히 챙겼다. "축구를 좋아하는 어린 친구들이니까, 기본기를 중심으로 하되 게임처럼 재미있게 진행해야겠다"고 했다.

파주의 축구소녀들이 '코치' 여민지의 첫 제자가 됐다. "오늘 저와 함께 뛰면서 축구가 재미있는 운동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고 가면 좋겠어요." 스트레칭 후 '여 코치'의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볼 감각 훈련으로 몸을 풀었다. 일렬로 늘어선 두 팀이 다리 사이로 패스 후 드리블로 골 포스트를 맞추고 돌아오는 릴레이 게임, '벌칙이 있다'는 말에 승부욕이 발동했다. 아슬아슬 승리한 팀이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환호했다. 진 팀은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앉았다 일어서기' 벌칙을 수행했다.

두번째 훈련은 '1인 1공'을 가지고 '인사이드, 아웃사이드, 양발 드리블'을 하다 신호시 상대의 볼을 빼앗는 게임. 볼 감각과 함께 밸런스, 전방 주시, 양발사용, 민첩성, 상황인지 능력을 키워주는 훈련이다. "축구를 잘하고 싶으면 볼을 내 마음대로 컨트롤할 줄 알아야 해요. 공만 보지 말고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피면서… 발바닥으로 이렇게…" '국대 코치'의 능숙한 시범에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아이들을 향해 '여 코치'가 말했다. "축구는 이 훈련을 계속 열심히 반복해야 해요. 인사이드, 아웃사이드, 드리블… 그래야 국가대표처럼 내 마음대로 공을 다룰 수 있어요. 지금 여러분 나이는 기본기가 가장 발전하는 시기예요."

1시간 기본기 훈련에 이어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전후반 각 15분, 미니게임이 시작됐다. 어느새 겨울 해가 졌다. 그라운드엔 야간조명이 켜졌다. 아이들은 추위도, 시간도 잊은 채 신명나게 내달렸다. 드리블하는 여민지를 향해 2~3명의 소녀가 한꺼번에 달라붙었지만 속수무책. 요리조리 공을 빼서 패스까지 이어가는 전광석화같은 움직임에 아이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팀 에이스'로 선수의 길을 선택한 6학년 박찬경양은 "국가대표 선수를 처음 봐서 떨렸는데 함께 볼을 차면서 너무너무 좋았다. 역시 드리블이 엄청났다"며 혀를 내둘렀다. "나도 열심히 해서 언니처럼 여자축구에 도움이 되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여민지 역시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C라이센스 교육 다녀온 후 생각보다 빨리 이런 경험을 하게 됐다. 아이들이 잘 따라와주고 재미있어 해서 저도 너무 즐거웠다. 좋은 경험을 했다"는 소감을 밝혔다. "미래의 여자축구를 위해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극 참여하겠다"며 웃었다.

▶파주 축구소녀들, 국가대표를 꿈꾸다

2015년부터 파주 여자어린이FC를 이끈 '대교 창단멤버' 여춘화 수석지도자는 축구가 가져온 여학생들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3년전만 해도 패스도 못하고 볼을 무서워했다. 공 맞고 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 볼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다, 그것이 제일 큰 변화다." 21명 중 무려 3명이 '축구선수'의 길을 결정했다.

2011년 전국 16개 교실에서 2명이 선수의 길을 택했다. 2015년 전국 48개 교실에서 20명, 지난해에는 21명으로 늘었다. 여춘화 지도자는 "방과후 활동이나 체육수업은 남학생 중심으로 이뤄진다. 여학생들이 축구를 하고 싶어도 편견 때문에 못하는 경우도 많다. 여자끼리 함께 공을 차고 달리면서 자연스럽게 재능이 나온다. 친구들과 좋아하는 운동을 함께하다 보니 진로 선택으로까지 이어지는 것같다"고 이유를 분석했다.

'6학년 쌍둥이 자매' 이시은-시연양(13)도 2015년부터 3년째 이 클럽에서 공을 찼다. 동생 시연양이 축구선수의 진로를 결심했다. 내년 여자축구팀이 있는 양평 단월중으로 진학한다. '국대' 여민지와 함께한 소감을 묻자 "국가대표는 확실히 달라요. 드리블 연습을 좀더 해야겠어요"라며 웃었다. 축구를 통해 '폭풍성장'한 자매는 생각도 야무졌다. "4학년때 축구 유니폼을 입고 학교에 갔는데 오빠들이 놀렸어요. 여자도 축구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건데, 학교에서 여학생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는 건 이상한 것이 아니라 평등한 거라고 말해주고 싶어요."(시연) "저희는 아이돌보다 축구가 좋아요. 아이돌 노래는 형식이 정해져 있지만 축구는 각본없는 드라마잖아요."(시은) 언니 시은양은 동생의 선택을 응원했다. "여자축구가 아직 그렇게 인기가 많지 않잖아요? 동생이 커서 남자축구선수들처럼 유명해지면 좋겠어요."

'쌍둥이 어머니' 박정현씨(42)는 "초등학교 때 길러야하는 것은 체력, 집중력이다. 국영수는 그 다음이다. 신체를 잘 활용할 줄 알고, 정신이 건강하면 공부는 따라오는 것"이라고 했다. "3년전만 해도 맨앞줄에 앉던 아이들이 축구를 하면서 키가 10cm씩 자랐다. 아무리 아파도 축구교실은 한번도 안빠졌더라. 아이들이 축구를 너무너무 좋아한다"며 웃었다.

'딸바보' 사커대디도 눈에 띄었다. '현선이 아버지' 서희경씨(46)는 매주 수업사진을 학부모 단체메신저에 올려 공유한다. "나는 K리그 수원 삼성 창단 서포터, WK리그 현대제철, 스포츠토토 팬이다. 딸과 축구 이야기를 함께 하고 싶어서 축구교실에 보내게 됐다. 대한축구협회와 대한체육회가 정말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업때마다 와서 영상도 찍고, 사진도 올린다. 현선이가 여자축구를 위해 기여하는 아이로 자라면 좋겠다"고 했다. 열정적인 코치와 학부모, 축구를 사랑하는 여학생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땀흘리는 한겨울 파주의 그라운드는 뜨거웠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여학생 체육활성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표했다. "여학생 스포츠 교실을 통해 땀 흘리는 건강한 여학생, 매일매일 운동습관 기르기 등 여학생 체육활성화의 좋은 모델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특히 여자축구 교실은 가장 호응이 높다. 이곳을 통해 엘리트 선수의 길을 택하고 성장하는 학생들도 매년 증가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를 적극 지원하고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파주=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