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준환(16·휘문고) 이전에 이준형(21·단국대)이 있었다.
'여왕' 김연아가 등장하며 르네상스 시대를 연 여자 피겨와 달리 남자 피겨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암흑의 터널을 지나왔다. 이규현이 2002년 솔트레이크올림픽에 나선 이후 아무도 올림픽 무대를 밟지 못했다. 그랬던 남자 피겨가 지난해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남자 김연아'라 불리는 차준환의 등장이었다. 남자 피겨도 이제 국제 무대에서 경쟁력을 가진, 팬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스타 선수를 갖게 된 셈.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차준환을 향했다.
그 곁에 그간 묵묵히 한국 남자 피겨를 지킨 선수가 있었다. '남자 피겨의 맏형' 이준형이다. 그는 차준환 이전 국내 남자 피겨 최강자였다. 2014년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파이널 무대에도 진출했다. 한국 남자 선수론 모두 최초였다. 국내 피겨 종합선수권에서도 세 번(2013, 2015, 2016년)이나 우승했다. 하지만 시니어 전환(2015년) 이후엔 이렇다 할 국제대회 성적이 없었다. 계속된 부상 불운에 울었다. 2015년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쳤고 디스크로 악화됐다. 그해 말 훈련 중엔 스케이트날에 오른쪽 정강이를 찔려 여덟 바늘을 꿰맸다. 잇단 부상 속에 이준형은 그렇게 잊혀지는 듯 했다.
하지만 맏형의 진가는 위기 속에 빛났다. 차준환의 부상으로 7월 1차 선발전에서 '깜짝 1위'에 오른 이준형은 9월 독일에서 열린 ISU 네벨혼 트로피에 한국 대표로 나섰다. 6위 안에 들어야 평창행 티켓을 거머쥘 수 있는 벼랑 끝 승부. 이준형은 5위에 오르며 16년만에 한국에 올림픽 티켓을 안겼다. 한국 피겨를 지켜온 이준형은 스스로 그 결실을 따냈다. 이를 악문 결과였다. 허리가 조금씩 좋아지며 연습량을 늘렸고, 땀방울은 자신감으로 돌아왔다. 특히 차준환의 존재는 좋은 자극제가 됐다. 이준형은 "준환이가 너무 잘 타고 있어서 자극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연습 때 더욱 뒤쳐지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했다"고 했다.
이제 평창행까지 한걸음만을 남겨두고 있다. 내년 1월에 열리는 3차 선발전에서 최종 주인공이 가려진다. 1위 이준형(1, 2차전 합계 459.12점)과 2위 차준환(431.58점)의 점수차는 27.54점. 큰 이변이 없는 한 이준형이 출전할 가능성이 높다. 이준형은 7월 선발전 이후 꾸준한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방심은 없다. 이준형은 "직접 따낸 출전권인 만큼 욕심이 생긴다. 그래서 더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일단 쿼드러플 점프는 3차 선발전에서도 뛰지 않을 생각이다. 이준형은 "연습은 하고 있지만, 완성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선생님께서도 무리는 하지 말자고 하셔서 다음 선발전에서도 시도는 하지 않을 것 같다"며 "대신 트리플 악셀을 포함해서 트리플에서는 실수가 안나오게끔 그 부분에 집중해서 훈련 중"이라고 했다.
이준형은 어릴적 올림픽 출전이라는 목표를 가슴에 새겼다. 계속된 부상으로 희미해지던 꿈은 현실이 되고 있다. 너무도 간절했기에, 좌절하지 않았기에, 꿈을 잃지 않았기에 찾아온 희망이다. "일단 올림픽에 나서는데 모든 힘을 쏟고 싶습니다. 올림픽에 나선다면 평생 간직한 꿈의 무대인 만큼 즐기면서 후회 없는 시합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한국 남자 피겨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평창올림픽에 대해 묻자, 이준형 다운 각오가 돌아왔다. 그가 걸어온 길을 안다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