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백지은 기자] 한 떨기 에델베이스를 연상시키는 배우, 이청아를 만났다.
에델베이스는 고귀한 흰빛이라는 뜻이다. 추운 겨울 눈 속에서도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피우기 때문에 역경을 이긴 꽃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청아 또한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도 말 못했던 힘든 시기를 딛고 이제는 진짜 배우로서의 꽃길을 예고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tvN 월화극 '이번 생은 처음이라'를 마친 소감을 들어봤다.
'이번생은 처음이라'는 집 있는 달팽이가 세상 제일 부러운 '홈리스' 윤지호(정소민)와 현관만 내 집인 '하우스푸어' 집주인 남세희(이민기)가 한집에 살면서 펼쳐지는 수지타산 로맨스 드라마다. 이청아는 극중 남세희의 첫사랑 고정민 역을 맡았다. 고정민은 실력을 인정받은 드라마 제작사 대표로 우연히 윤지호의 '거북이 고시원' 대본을 보고 그에게 컨택한다. 그러다 10년 만에 남세희와 재회하게 되는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첫사랑 캐릭터는 드라마에서 아련한 추억의 주인공으로 남겨지거나, 다시 돌아와 주인공 커플의 사랑을 흔드는 방해꾼으로 그려지기 마련이지만 이청아의 고정민은 남세희의 남겨진 상흔을 어루만지고 윤지호에게는 꿈을 이룰 기회를 주는 멋진 캐릭터였다.
"사실 나는 항상 첫사랑 캐릭터였다. '늑대의 유혹' 때는 시작되는 첫사랑이었고 '운빨로맨스'도 포지션이 비슷했다. 배역이 나와 함께 나이가 드는 것 같다. 20대까지는 시작하는 첫사랑이었고, 30대가 돼서는 다시 나타난 첫사랑이다. 첫사랑 이미지가 나와 잘 붙는구나 싶어서 이걸 잘 인지하고 사용하면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캐릭터는 내가 특별하게 소화했다기 보다 한번 흔들었다가 다시 나타난 캐릭터라 신선하게 보신 것 같다. 나는 정민이 어떻게 그렇게 큰 아픔을 극복하고 남세희를 응원해주는 건지 이유를 찾으려 했다. 정민에게도 아픈 상처를 녹여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고 그래서 세희의 상처를 이해하고 녹여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연기했다. 그래서 사랑을 방해하는 첫사랑이 아닌 다른 인물이 되지 않았나 싶다."
생각해보면 이청아라는 이름을 처음 대중에게 알린 '늑대의 유혹'은 2004년 작이다. 그때부터 13년 간 첫사랑 이미지로 남는다는 게 배우로서는 좋을 수도, 답답할 수도 있는 일이다. 배우라면 항상 다른 캐릭터에 도전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이제 좀 색이 변하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듣는다. 사실 나는 항상 새로운 걸 하고 있었다. 나에게 없는 귀여움을 쓰느라 힘들었는데 '뱀파이어 탐정'에서 시니컬하고 때려 부수는 액션도 해봤다. 그전에 못 보여줬던 새침한 첫사랑을 '운빨로맨스'에서 해봤다. 그런데 많이 눈에띄지 않으면 이미지를 바꿀 수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열심히 해도 시청자의 마음에 닿는 게 쉽지가 않다. 마음에 닿는 작품을 많이 하고 싶다."
수많은 첫사랑 캐릭터를 연기했지만, 이청아에게 있어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신선한 도전이었다. 처음으로 본인의 나이보다 많은 배역을 소화하게 됐기 때문.
"내가 되고 싶은 38세를 연기하게 되더라. 사람은 자기 삶이 안정됐을 때 세상을 조금 예쁘게 볼 수 있는 것 같다. 나도 2010년 구겨져 있던 시기가 있었다. 어머니 병환을 알게 됐는데 작품도 1년 쉬게 돼서 재정적으로도 작품적으로도 정말 모든 게 최저였다. 늘 다이어리를 적는데 그때 다이어리를 보면 얼마나 힘들었는지가 보인다. 병원비가 많이 나오니까 일을 더 해야하는데 작품은 하고 싶어도 안 들어오고, 예능이나 여행 프로는 '엄마가 이런데 내가 나가서 웃고 떠들 수 있을까' 싶어 못 했다. 회사도 밉고 사람이 꼬여가는 게 너무 무섭더라. 그걸 극복하는데 6개월이 넘게 걸렸다. 다행히 그때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힘든 암흑기에 힘이 되어준 건 주변 지인들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호박꽃 순정'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배종옥이다.
"선배님이 힘들다는 말도 안했는데 어떻게 아시는지…. 마치 내 마음을 아는 것 같은 얘기들을 해주셨다. '연기 힘들지? 네 나이에는 나도 힘들었어'라며 노희경 작가님과의 에피소드 등 많은 얘기를 해주셨다. 그때 '내가 욕심이 많구나. 이러다 보면 저기까지 갈 수 있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며 구겨진 게 많이 펴졌다. 선배님이 전부터 연극하라는 얘기를 해주셨는데 작년에 장진 감독님의 연극 오디션에 추천해주셔서 운 좋게 작품도 할 수 있게 됐다. 선배님들이 연기 준비하시는 걸 몇 개월 동안 같이 본다는 게 너무 좋았다. 공짜 도강하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를 보내며 스스로를 다졌기 때문에 고정민이라는 배역 또한 임팩트 있게 소화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안 겪어봤으면 정민을 이해 못했을 것 같다. 작가님이 주신 비하인드에 정민은 홀어머니를 모시는 어려운 집 학생이고, 세희는 여유가 있는 집이라고 되어 있었다. 비하인드 서사가 탄탄했다. 과거 세희도 우리 엄마에게 준 상처를 알았을텐데 그걸 건드리니까 정말 화가 났다. 내가 실제로 '엄마'에서 멈칫 하는 게 보이더라. 나는 정말 정민이 어른스럽다는 것만 생각했는데, 막상 세희랑 연기를 하니까 '엄마'에서 훅 화가 나고 '너 꿈 이루는 법 알잖아'라고 하니 진정이 되고 감정이 움직였다. 사실 후반 투입이라 굉장히 초조하고 부담됐다. 그런데 쭉 같이 작품을 보면서 함께 오니까 나도 모르게 등장인물들에게 쌓인 감정이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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