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급 세터' 한선수(32·대한항공)는 올 시즌 초반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지난 시즌과 비교해 전력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경기력에 엇박자가 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주포 가스파리니와의 호흡이었다. 지난 시즌보다 낮고 빠른 토스를 통해 가스파리니를 포함한 공격수들의 스피드를 향상시키려고 했지만 정상적인 몸 상태를 끌어올리지 못한 가스파리니가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스파리니 퇴출을 결단하지 않은 이상 경기력을 살려내야 했다. 결국 박기원 대한항공 감독이 칼을 빼 들었다. 원 시스템 복귀를 주문했다. 스피드를 줄이고 토스를 높이는 전략이었다. 가스파리니에게 전달되는 토스에 한정된 얘기였다. 그러나 이것이 한선수에게 혼란을 야기했다. 공격수들의 입맛에 맞는 토스를 배달하기로 유명한 한선수도 두 가지 패턴을 갑자기 한꺼번에 소화하기 쉽지 않았다. '포커페이스'의 일인자 한선수의 얼굴도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주장이기 때문에 코트에서 동료들을 격려하고 밝은 에너지를 전달해줘야 했지만 레프트 김학민과의 호흡마저 불안해지면서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한선수는 숨 고르기에 돌입했다. 소위 자숙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주장이라는 책임감이 짓누르는 부담감도 그렇지만 들쭉날쭉한 경기력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는 세터인 자신에게서 문제점을 찾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박 감독은 "한선수가 혼란기를 겪고 있다. 스스로 괴로워하고 스트레스를 받더라. 그래서 일주일 정도 정신적으로 휴식을 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24일 우리카드전(3대0 승)부터 한선수 대신 황승빈을 활용하면서 분위기 반전을 이뤘다. 박 감독은 28일 현대캐피탈전(3대2 승)에서도 황승빈을 선발로 내세웠고 한선수는 위기 상황 때마다 간헐적으로 투입했다.
박 감독이 한선수를 교체로 활용하는 건 경고의 의미가 아니다. 기량 저하 때문도 아니다. 배려의 의미가 크다. 박 감독은 "사실 한선수를 뺀다는 건 나에게도 굉장한 부담이다. 그러나 엇박자가 지속되는 걸 막기위해선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한선수가 빨리 올라올 수 있도록 시간을 벌고 있는 중"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첫째, 힐링이 돼야 한다. 둘째, 체력적으로 올라올 수 있도록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지금 선수들로 남은 시즌을 버티기 힘들다. 한선수가 마지막 결정타가 돼야 한다"며 "한선수의 문제 뿐만 아니라 현재 팀 내 드러난 문제를 통합해서 한 방에 풀어야 한다"고 전했다.
수면 아래서 잠시 잠영 중인 한선수. 그가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 박 감독의 마지막 카운터 펀치가 될 수 있을까. 대한항공의 올 시즌 농사가 그의 어깨에 걸려 있다.
김진회 기자 manu35@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