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미치도록 멀리 보내고 싶다.'
남자에게 골프 승부란 스코어가 전부가 아니다. 또 다른 요소가 있다. 비거리다.
스코어가 엉망이어도 그날의 티샷 몇개가 짱짱하게 날라갔다면 엉망이 된 스코어카드로 받은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되는 느낌이 든다.
비거리에 대한 집착은 남성의 심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남성성'에 대한 상징적 동일시의 경향이 있다. 공중 목욕탕에서 다른 남성의 심벌을 슬쩍 보고 자신과 비교하는 심리와 어쩐지 닮아있다.
어쨌든 동반자 보다 단 한 뼘이라도 더 나가면 속으로 으쓱 하는게 남성 골퍼들의 심리다.
그렇다면 남자들이 이토록 집착하는 비거리는 과연 싱글로 가는 길에 있어 큰 도움이 될까?
'드라이버는 쇼, 퍼팅은 돈' 이란 말이 있다. 스코어를 좌우하는 건 결국 퍼팅이란 뜻이다. 하지만 이는 상대적인 이야기다. 드라이버를 멀리 때리는 골퍼가 퍼팅이 정확한 골퍼에게 질 확률이 높다는 뜻일 뿐이다. 같은 조건이라면 비거리가 나는 골퍼는 당연히 유리하다. 골프가 편안해진다. 숏 아이언을 잡으면 상대적으로 거리, 방향성 확보가 쉽다. 탄도가 높아 그린에서 공을 세우기 쉽다. 결국 '장타자가 스코어에 유리하다' 라는 명제가 참이 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붙는다. '똑바로, 꾸준히' 다.
결국 골퍼에게 드라이버 비거리 늘리기도 포기해서는 안되는 훈련 포인트다. 단, 비거리는 하루 아침에 느는 것이 아니다. 극복 가능한 신체, 연령별 개인 차의 범위가 분명히 존재한다. 가장 좋지 않은 것은 '뱁새가 황새 따라가기'이다. 동반자 중 장타자가 있으면 그보다 멀리 보내려다 라운드를 망친 경험,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능력 범위를 인정하기다. 그래야 라운드를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게 된다.
5일 경기도 여주 블루헤런 골프클럽에서 만난 하이트진로 챔피언십 우승자 이승현(26)이 인터뷰에서 '비거리'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이승현은 '퍼팅의 달인'으로 불린다. 퍼팅을 워낙 잘한다. 하지만 드라이버는 '짤순이'였다. 지난해 약점이던 드라이버 비거리를 늘렸다. 하지만 지난 겨울을 충실하게 보내지 못하면서 늘었던 비거리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지난 겨우내) 살이 빠지고 운동도 잘 못했어요. 이번 시즌에 거리가 안나는 요인이었던 것 같아요."
문제는 심리였다. 늘었던 비거리가 줄어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작년에 많이 나왔던 비거리가 줄어드니까 올해는 전반적으로 스트레스가 있었어요."
세컨샷을 다시 길게 치려 하니 부담감이 커졌다. "제가 원래 롱아이언하고 우드를 잘 쳤거든요. 그런데 오랜만에 하려니 부담도 되고 골프가 어려워지더라고요."
이번 하이트진로 대회 전까지 시즌 첫 승 신고를 미뤄왔던 이유였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생각을 바꿨다. 핵심은 바로 짧은 비거리에 대한 '인정'이었다.
"욕심내지 말고 내 거리로 치자고 생각했어요. 긴 클럽이든 짧은 클럽이든 어느 순간에나 핀에 붙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거든요. 우드로도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죠. 이번 대회장(블루헤런 골프클럽) 거리가 길었잖아요. 생각을 전환하니까 골프가 재밌어지고 편안하게 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실제 그랬다. 이승현은 자신의 단점 보다 장점에 집중했다. 장타 욕심을 버린 자리에 전략적 홀 공략과 퍼팅 집중력을 채웠다. 코스 매니지먼트에 성공하면서 버디 기회가 잦아졌다. 그린 위에서 자신의 장점인 퍼팅에 집중했다. 최종 라운드에서 이승현이 기록한 6개의 버디는 모두 5m 이상(4번홀 5m-6번홀 5m-10번홀 6m-13번홀 10m-14번홀 10m-18번홀 5m) 되는 중장거리 퍼팅이었다. 특히 추격자들에게 카운터펀치가 된 13,14번홀 연속 버디는 두 홀 모두 10m 짜리 롱퍼팅이었다.
자! 남성 골퍼들이여, 이젠 자신의 비거리를 '인정'하자. 비교와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거리만큼만 '똑바로, 정확하게' 보내는 것으로 1번홀 티잉 그라운드를 출발하자. 그래야 라운딩을 매니지먼트 하고 즐길 수 있게 된다.
인터뷰장을 떠나는 이승현의 마지막 한마디가 인상적이다. "다시 태어나면요? 당연히 장타보다 퍼팅을 선택하겠죠."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