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부산=조지영 기자] 개막작 '유리정원'이 각종 논란과 외압에 물든 부산영화제에 '표현의 자유'라는 메시지는 던졌다.
12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우동 영화의전당 두레라움홀에서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유리정원'(신수원 감독, 준필름 제작)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세상이 준 상처로 어릴 적 자랐던 숲 속 유리정원 안에 스스로 고립한 과학도 재연 역의 문근영, 첫 소설의 실패로 슬럼프를 겪는 무명작가 지훈 역의 김태훈, 재연이 믿고 의지하는 교수 역의 서태화, 대학원생 수희 역의 박지수, 현 역의 임정운, 그리고 신수원 감독, 강수연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오는 25일 국내 개봉에 앞서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전 세계 최초로 공개된 '유리정원'은 베스트셀러 소설에 얽힌 미스터리한 사건, 그리고 슬픈 비밀을 그린 미스터리 작품이다. 문근영, 김태훈, 서태화가 가세했고 '명왕성' '마돈나' 등으로 대한민국 여성 최초로 칸,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신수원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매 작품 날카로운 통찰력과 섬세한 연출로 심도 깊은 주제의식이 담긴 작품을 선보인 신수원 감독. 전작들에서 일상 속 판타지를 그렸던 그는 이번 '유리정원'에서 판타지적인 요소에 현실적인 공감을 녹여 일상과 환상의 경계를 허무는 독특한 연출 방식을 선보였다. 여기에 숲이라는 몽환적인 배경을 더해 압도적이고 경이로운 미쟝센을 과시했다.
신수원 감독은 "이렇게 플래시 세례를 받으니 불꽃놀이에 온 곳 같다. 2년 전 부산영화제를 찾았는데 올해 다시 찾아오게 돼 기쁘다. '유리정원'은 꿈이 사라진 한 과학도가 무명의 소설가를 만나면서 펼치는 판타지다. 오래 전 구상했던 이야기다. 영화를 시작하기 전 소설을 썼다. 그때 느꼈던 지점과 고민을 영화로 풀어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마돈나'를 구상할 때부터 소설가가 주인공인 영화, 그런데 이 소설가가 상처 입은 여자를 만나고 그런 여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리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야기를 쓰다 보니 잘 안풀려 덮었다. 그리고 '마돈나'를 준비했는데 또 문득 '유리정원'이 떠오르더라. 식물인간과 연관을 시키면서 이야기를 발전해나갔다. '마돈나'가 끝난 이후 바로 '유리정원'에 돌입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누군가의 삶을 내가 가져가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고통에 처해진 존재들, 루저들을 많이 다뤄왔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많이 고민했다. 내가 만든 가치를 누군가에게 빼앗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빼앗는 것이기도 하다. 창작자로서 고민을 계속 해오는 것 같다"며 "사실 '유리정원'이 많은 관객으로부터 공감을 살 수 있을지 고민됐다. 그래서 배우들도 연기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유리정원'에서 이상이 실현되는, 꿈이 실현되는 캐릭터로 비춰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신수원 감독은 영화계 블랙리스트 논란도 언급했다. 그는 "지난해 영화제가 많이 힘들었다. 또 영화인들이 블랙리스트 논란으로 괴로웠다. 어떤 방식이든 표현의 자유를 막아서는 안된다. 나는 운좋게 피해갔지만 블랙리스트의 잣대로 보는 일이 있었다. 앞으로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또한 감독조합 소속 회원으로 부산영화제 보이콧에 대해 "나는 감독조합 소속 감독 중 하나로 지난해는 조합의 투표 결과에 따라 부산영화제 보이콧을 했다. 올해에는 보이콧이 철회되지 않았지만 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지침이 있었다. 올해 부산영화제 참석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외압으로 힘들었던 부산영화제이지만 이 영화제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이 도와주지 않는 신인 영화인을 발굴하는 자리다. 작은 영화는 소개할 자리가 많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영화제가 계속 생존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올해 참여하게 됐다. 또 영화는 내 개인의 것이 아니다. 많은 스태프, 배우, 투자자가 있다. 그래서 부산영화제에 참석한 것도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강수연 집행위원장 역시 "영화제는 관객이 만드는 것이다. 어떤 정치적인 입장이 있더라도 영화제의 주인은 영화인과 관객들이다. 어떻게 변화할지 장담할 수 없지만 '유리정원'처럼 아름다운 영화가 계속 만들어 진다면 좋겠다. 영화제가 본연의 정신을 잃지 않는 영화제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지난 2월 급성구획증후군 진단을 받고 4차례에 걸쳐 수술한 뒤 건강 회복을 위해 활동을 중단, 올해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유리정원'을 통해 활동을 재기한 문근영 또한 눈길을 끈다. 9개월 만에 컴백한 문근영은 '유리정원'에서 미스터리한 과학도를 맡아, 그동안 본 적 없는 새로운 분위기의 파격 변신을 시도했다. 보는 이들을 얼어붙게 만드는 문근영의 눈빛 연기가 압도적이라는 평이다.
문근영은 "뜻깊은 자리에 참석할 수 있게 돼 너무 기쁘고 떨린다. 잘 부탁드린다"며 마음을 전했다. 그는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이야기가 너무 매력적이었고 특히 캐릭터에 깊은 끌림이 있었다. 아픔과 상처, 훼손된 순수함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 등 다른 매력을 가진 캐릭터인 것 같아 끌렸다. 일방적인 애정일 수도 있고 배우로서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뭔가 잘 표현하고 잘연기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촬영할 때도 그렇게 되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힘든 점도 있었지만 행복하게 작업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어 "그동안 부산영화제에 몇 번 참석했지만 한 번도 내 영화로 온 적은 없다. 내 영화가 개막작으로 부산영화제에 참석하게 돼 영광스럽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화제이고 많은 관객이 관심을 가져주는 영화제다. 많은 분께 '유리정원'을 선보일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한편, 올해 부산영화제는 오늘(12일) 개막해 21일까지 10일간 부산 일대에서 성대하게 개최된다. 월드 프리미어 100편(장편 76편, 단편 24편), 인터내셔널 프리미어 29편(장편 25편, 단편 5편), 뉴 커런츠 상영작 10편 등 전 세계 75개국, 298편의 영화가 부산을 통해 선보인다. 개막작은 한국 출신 신수원 감독의 '유리정원'이, 폐막작으로는 대만 출신 실비아 창 감독의 '상애상친'이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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