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하순, 메밀꽃 필 무렵이다. 강원도 평창 등 산간지방은 이미 이달 초부터 메밀꽃이 산야를 하얗게 점령하며 가을을 알렸다. 하지만 남쪽 제주에서는 그 자태가 이제부터 볼만하다.
메밀꽃은 생김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굵은 소금을 흩뿌리듯 대지를 뒤덮은 하얀 자태가 또 다른 감흥으로 다가온다.
화려한 국제 관광도시 제주는 '메밀의 섬'이기도 했다. 가난하던 시절 메밀은 제주도민들의 삶을 지탱해준 대표 구황식물로, 척박한 돌밭에서 나는 메밀이야 말로 황금 보다 더한 귀물이었다. 그 메밀로 국수를 삶고 빙떡을 말아 허기를 달래고 아이를 키우며 일상을 꾸렸다.
지금도 제주에는 구좌, 애월 등지에서 메밀을 연중 두 차례씩 수확하며 토속 음식의 명맥을 잇고 있다. 오라동 중산간지대에서는 아예 30여만 평의 대규모 메밀밭을 일궈 이맘때면 축제도 벌인다. 이른바 '경관 투어리즘'의 전형으로, 위로는 한라산이 보이고 아래로는 제주시와 제주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이 같은 연유로 메밀음식은 예로부터 제주의 대표 별미거리 중 하나로 통했다.
제주 토박이들은 제주 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를 사용해서 소박한 미식거리를 챙겼다. 특히 제주도에서 많이 나는 꿩고기를 메밀국수와 함께 끓여낸 '꿩메밀칼국수'는 별미 중 으뜸으로 꼽혔다. 물론 이는 제주도 부잣집에서 즐겼던 음식이다. 제 아무리 제주도에서 꿩이 많이 잡혔다고는 하지만 그 고기 맛을 서민들까지 누릴 형편은 못되었기 때문이다.
꿩메밀칼국수는 꿩육수에 메밀칼국수를 넣고 걸쭉 담백하게 끓여 내는데, 국물 맛이 일품이다. 담백한 듯 고소하고 시원한 뒷맛이 느껴지는 게 특징이다.
맛을 내는 비결은 육수에 있다. 꿩을 통째로 삶아 고기를 건져 낸 후 살은 발려 메밀국수 웃기로 사용한다. 그 뼈를 다시 고기 삶은 물에 넣고 소금, 생강, 대파를 추가한 뒤, 은근한 불로 네댓 시간 더 우려내면 비로소 시원 구수한 육수가 만들어진다.
우선 국물을 한 숟갈 뜨면 입안에 척 감기는 그런 느낌부터 부터 받는다. 바지락 칼국수처럼 시원한 맛과는 또 다른, 부드럽고 구수한 맛이다. 꿩육수와 메밀, 그리고 참기름이 어우러지니 그야말로 담백 구수한 맛이 어디에 또있을까 싶을 정도다. 꿩과 닭이 뭐 그리 다르겠는가 싶겠지만, 국물 맛을 보면 그 차이를 느낄 수가 있다. 꿩 육수는 닭국물처럼 고소함은 적지만 더 시원하다.
꿩메밀칼국수의 면발 또한 부드럽고 구수하다. 메밀은 본래 점성이 적어 면을 뽑기가 쉽지 않지만 제대로 꿩메밀칼국수를 끓이는 집들은 100% 순메밀가루만을 고집한다. 메밀면도 구수한 맛을 내는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젓가락질에도 면이 툭툭 끊기다보니 어느 정도 먹다가는 숟가락으로 떠먹기도 한다. 하지만 메밀면을 먹을 줄 아는 사람들은 뚝뚝 끊기는 순메밀면 특유의 느낌이 왠지 제대로 된 것을 맛본다는 기분이 들어 더 좋다고 입을 모은다.
꿩메밀칼국수는 제법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반죽에서부터 면썰기 등도 신경을 써야하고, 반죽을 얇게 밀어 가지런하게 썬 다음 팔팔 끓는 육수에 메밀면, 무채, 삶아 찢어 둔 꿩고기를 넣고 끓여야 제대로 된 맛을 낼 수가 있다. 그런 후 소금과 참기름을 넣고 간을 맞춘 뒤 그릇에 담아 깻가루와 잔파를 얹어 상에 올린다. 정성이 반이 넘는 음식인 셈이다.
이맘때부터 제주의 중산간은 메밀이, 오름은 억새가 점령해갈 차례다. 가을 햇살아래 한껏 부푼 은빛 억새와 메밀꽃의 장관을 감상한 후 맛보는 별미로 꿩메밀칼국수 한 그릇을 권한다. 제주 토박이의 삶과 애환, 낭만까지 함께 음미할 수 있는 미식거리로 이만한 게 또 없겠기에 그러하다. 김형우 문화관광전문 기자 hwkim@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