훤칠한 키와 앙 다문 입술, 다부진 표정. 영락없는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설기현이었다.
하지만 그의 자리는 더 이상 A대표팀에 없었다. 울리 슈틸리케 전 감독이 성적부진 끝에 물러나면서 코치였던 그의 역할도 끝났다. 11일 강원도 양구종합운동장에서 만난 그의 직함은 '성균관대 감독'이었다. 지난 2월 슈틸리케 감독의 부름을 받아 A대표팀 코치로 '파견'을 나갔던 설 감독은 5개월 만에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대한축구협회는 부진을 거듭하던 슈틸리케호에 외국인 코치를 추가할 계획이었으나 여의치 않자 국내 지도자로 눈을 돌렸고 설 감독을 호출했다. 현역시절 A대표팀과 유럽 무대에서 쌓은 경험, 지도자 시절 성균관대서 선보인 '소통' 능력에 주목했다. 설 감독은 "선임 제의를 받은 뒤 왜 나를 원하는지 의아했던 게 사실이었다"면서도 "(A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도울 자신이 있다"고 의지를 드러냈다. 하지만 슈틸리케호는 좀처럼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급기야 6월 카타르 원정에서 패하면서 9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 전망에도 먹구름이 끼었다. 설 감독 역시 제 역할을 못한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슈틸리케 감독이 경질되면서 설 감독도 제 자리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이날 성균관대는 중앙대와 제13회 1, 2학년 대학축구대회 결승에서 만났다. 2015년부터 설 감독이 키워낸 두 학년 선수들이 서는 무대였다. 선수단은 고작 15명. 매년 신입생 선발 수를 8명으로 제한한 학교 정책에 따르다보니 학년 제한이 있는 대회에 가용할 자원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여건을 딛고 결승까지 치고 올라온 것 자체가 이슈였다. 운명의 장난도 그라운드를 수놓았다. 성균관대를 상대한 중앙대 사령탑은 2014년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당시 최강희 전 감독(현 전북 현대)을 수석코치로 보좌했던 최덕주 감독이었다.
성균관대의 잔칫날은 아니었다. 전반 19분 중거리포를 얻어 맞은 성균관대는 8분 만에 추정호의 헤딩골로 균형을 맞췄다. 하지만 후반 27분 중앙대에 재차 실점하면서 결국 1대2로 준우승에 그쳤다. 담담하게 그라운드를 바라보던 설 감독은 그라운드에 쓰러진 제자들을 일으켜 세운 뒤 박수를 보내며 아쉬움을 달랬다.
설 감독은 "성균관대 부임 후 입학생들과 나선 대회라 의미가 있었다. 비록 오늘 패하긴 했으나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그는 "대표팀에서 좋은 경험을 했다. '지도자는 항상 부족한 점이 있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 대표팀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무대에서) 다시 배운다는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신태용 체제로 전환한 A대표팀을 두고는 "현 대표팀 분위기를 잘 아실 것이다. 그만큼 팀을 잘 만들어주실 것이다. 남은 두 경기서 좋은 결과를 낼 것"이라고 응원 메시지를 보냈다.
양구=박상경 기자 ppar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