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라이온즈 사람들은 2016년을 기억에서 말끔하게 지우고 싶지 않을까. 직전 시즌까지 5년 연속 페넌트레이스 1위를 한 팀이 급전직하 9위로 추락했다. 10위 kt 위즈가 출범 2년차 신생팀이나 나름없다는 걸 감안하면 꼴찌나 다름없다. 주축 선수 몇몇이 빠져나가자 '삼성 왕조'는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일부 주축 선수의 해외 원정 도박 사건은 구단 이미지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모기업에서 야구단 운영을 회의적으로 바라볼만도 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새 구장 삼성라이온즈파크 개장 첫 해에 그랬다.
지난 해가 삼성 야구 역사상 최악인줄 알았는데, 올 시즌 초반은 더 심각했다. 4월 30일까지 개막 후 한달간 26경기에서 4승(2무20패). 끊임없이 나락으로 굴러떨어져 회생불능, 끝이 안 보이는 터널에 갇힌 듯 했다. 그런데 시즌 100패를 걱정하던 팀이 살아나, 탈꼴찌를 바라보고 있다.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지난 시즌, 최악으로 치달았던 올 시즌 초반을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외국인 타자 부진이다. 타선의 중심을 잡아줘야할 외국인 전력이 역할을 못해주면서 타선 전체가 무기력증에 빠졌다.
아롬 발디리스. 이 선수 역시 삼성에선 금기어가 된 이름이다. 일본 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즈, 오릭스 버팔로스,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를 거쳐 지난해 삼성 입성. 일본 프로야구에서 몇 년을 버텨낸 경력, 이름값이 스카우트팀 판단을 흐리게 한 걸까. 발디리스는 오랜 시간 부상으로 전력에서 빠져있다가, 반짝하더니, 지난 해 8월 짐을 쌌다. 주축 타자로 기대했던 외국인 전력이 44경기에서 타율 2할6푼6리(154타수 41안타), 8홈런, 33타점을 기록하고 떠났다. 전체 시즌의 3분 1도 소화하지 못했으니 참사 수준이다.
올 시즌 초반 적지않은 팬들이 다린 러프를 보면서, 지난해 발디리스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우여곡절끝에 총액 110만달러를 투입해 데려온 외국인 타자. 고성능인줄 알았는데, 제대로 작동이 안 됐다.
개막전부터 18경기에 출전해 타율 1할5푼(60타수 9안타), 2홈런, 5타점, 장타율 2할5푼에 출루율 3할1리. 아쉬움을 넘어 허탈하게 만드는 성적이다. 4번 타자의 부진은 중심 타선 전체에 악영향을 줬다. 2군행은 당연한 수순이고, 교체 얘기가 나올만 했다. 그런데 4월 말 1군 전력에서 빠졌다가 5월 초 복귀한 후 같은 사람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달라졌다.
1군에 돌아온 러프는 이후 39경기에서 타율 3할4푼9리(146타수 51안타), 9홈런, 42타점, 장타율 6할1푼6리, 출루율 4할3푼9리을 기록했다. 특히 찬스에서 강했다. 주자가 없을 때 타율이 3할1푼1리, 주자가 있을 때 3할8푼9리, 득점권에서 4할9리를 기록했다. 연장전에서 3타수 3안타(1홈런)를 기록한 게 눈에 띈다.
4번 타자 러프가 기지개를 켜자 웅크리고 있던 라이온즈도 기운을 차렸다. 러프의 부활이 팀 상승세와 살짝 맞물렸다. 비교대상이 될 수 없겠으나, 벌써 지난해 발디리스를 훌쩍 넘었다.
민창기 기자 huelv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