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신태용 20세 이하(U-20) 대표팀 감독은 자타공인 '밀당(밀고 당기기)'의 귀재다.
스스로도 '밀당'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20일 오후 8시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펼쳐진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 기니와의 개막전(3대0 승) 후 공식 기자회견, 아르헨티나와의 2차전(23일 오후 8시, 전주월드컵경기장) 예상 엔트리를 묻는 질문에 신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답하기 곤란하다. 나머지 선수들의 의욕 상실이 우려된다. '밀당'의 차원으로 보면 좋겠다. 내 나름대로의 생각, 노하우가 있다."
세상 리더들에게, 연애 고수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 일명 '밀당'이다. 신 감독은 어린 선수들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지도자다. 어찌 보면 기분을 맞춰줄 줄 안다. 축구는 분위기다. 신이 나면, 몸은 절로 움직인다. 전력의 핵, '바르샤 듀오' 이승우-백승호를 향한 신 감독의 '밀당'…. 성격도 스타일도 전혀 다른 이들을 상대하는 방법이 제각각 다르다. 마치 '과묵한 순둥이 장남'과 '애교쟁이 재간꾼 차남'을 대하는 우리 아버지들의 태도가 다르듯이….
▶'순둥이' 백승호는 강하게
20세 이하 대표팀 감독이 된 직후 신 감독은 '백승호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지난 2월 첫 만남 직후 백승호의 체력 문제를 기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거론했다. 백승호는 올시즌 바르셀로나B팀에서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체력과 경기 감각 저하는 일견 당연했다. "전반 20분짜리 선수"라고 혹평했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훈련중 "네가 선수야!"라는 쓴소리도 서슴지 않았다. 엘리트 코스만 밟아온 어린 에이스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법한 상황, 신 감독은 한켠으로 언론을 통해 굳건한 믿음을 드러냈다. "백승호는 분명히 필요한 선수다. U-20월드컵에 반드시 데려가겠다."
3월 바르셀로나 구단을 직접 방문해 백승호의 컨디션을 점검했고, 백승호의 훈련, 경기 스케줄을 조율했다. 백승호는 3월, 4개국 친선대회 후 소속팀에 복귀하지 않았다. 홀로 파주NFC에 남아 루이스 플라비우 피지컬 코치와 함께 단내 나는 체력 훈련을 이어갔다. 신 감독은 인천, 수원FC, 전북과의 연습경기에도 백승호를 잇달아 출전시켰다. 경기중 호흡을 조절하는 모습이 보이면 "체력이 차오르는 한계 상황에서 더 뛰라"고 다그쳤다.'순둥이' 백승호는 감독의 의중을 간파했다. 5월, 기니와의 개막전까지 '90분짜리, 100%'의 선수가 돼야 했다. 웨이트트레이닝을 통해 근력과 파워를 동시에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4개국 친선경기, 3차례 평가전을 통해 서서히 경기 체력을 '90분'짜리로 끌어올렸다. 올해 신태용호의 7경기에서 4골을 터뜨렸다. 11일 우루과이전(2대0승)에서 처음으로 90분을 소화했다. 신 감독은 "이제 100%가 된 것같다"고 선언했다.
18일 기니전 직전 인터뷰, 백승호는 스스로 "이제 풀타임은 맘만 먹으면 뛸 수 있다. 몸 상태는 거의 100%"라고 공언했다. '결전지' 전주 훈련장에서 백승호는 21명의 선수 가운데 가장 검게 그을린 선수였다.
기니와의 개막전 '100%의 백승호'가 홈 그라운드를 누볐다. 2-0으로 앞선 후반 36분 정태욱의 헤딩 패스를 재치있게 발을 톡 갖다대 방향을 틀었다. '왜 백승호인가'를 증명하는 원터치 쐐기골을 넣은 후 태극마크에 키스했다. 후반 41분 신 감독은 백승호를 벤치로 불러들였다. '백승호 타임', 전주성을 가득 메운 4만 관중의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신 감독이 그를 향해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튀는 아이' 이승우는 부드럽게
지난 16일 전주 입성 후 '신태용호 스타' 이승우의 헤어밴드는 화제가 됐다. 훈련장에서 두터운 머리띠 패션을 고수했다. 취재진이 호기심을 표하자 "훈련 때 그냥 쓰는 것이다. 별 의미 없다. 땀 흡수가 잘된다"고 둘러댔다. 기니와의 개막전, 머리띠 아래 꽁꽁 감춰둔 이승우의 비밀이 공개됐다. 투블럭 헤어컷 아래 금빛으로 SW, V 이니셜을 새겼다. SW는 승우라는 이름의 이니셜이자 'Six Win(6연승)으로 수원(SuWon, 결승전이 열리는 수원월드컵경기장)에 가자'는 뜻, V는 말 그대로 '승리의 V'라고 했다. 전반 36분 수비수 5명을 제치는 30m 드리블, 짜릿한 슈팅으로 승리의 포문을 열었다. 후반 31분, 상대 수비 가랑이 사이를 통과하는 감각적인 스루패스로 임민혁의 쐐기골을 도왔다. 다짐했던 6연승의 스타트를 보란 듯이 끊었다.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이니셜' 얘기가 나왔다. 신 감독은 "15일 외출 다녀와서 16일 아침에 봤다. 요상하게 돼있더라. 의미를 물으니 승리 염원이라고 했다. 의미가 좋아서 잘했다고 했다"며 웃었다. "기자분들한테 숨기려다보니 너무 색이 바랜 것 아니냐, 염색을 더하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하지 말라'는 잔소리 대신 '더 하라'고 독려하는 요상한 감독, 이것이 신 감독이 '튀는 아이' 이승우를 대하는 방식이다.
자유분방하고 개성 넘치는 이승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윽박지르거나 억지로 주저앉히지 않는다. 신 감독은 "이런 개성을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승우에게도 계속 표출하라고 한다. 그 대신 그에 맞는 책임도 져야 한다. 행동만큼 경기장에서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다."
신 감독의 '밀당'은 통했다. '튀는 아이' 이승우는 신태용호 최고의 팀 플레이어다. 그라운드에서 누구보다 헌신하는 선수가 됐다. 기니전, 공격뿐 아니라 수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휘슬이 울린 후 다리에 쥐가 나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달리고 또 달렸다. 월드컵 무대에서 이름을 알리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내 이름을 알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팀 목표를 이루는 것이 내 목표다. 우리 목표는 일단 예선 통과이고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끝까지 가는 것이다."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받고 존중받는 스무살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신바람 나게 뛰고 또 뛴다. 신 감독의 은밀하고 위대한 '밀당'이 에너지원이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