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3위 소주기업인 무학이 근래들어 악재가 잇달아 터지며 날개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경남을 대표하는 주류기업인 무학은 간판 브랜드인 '좋은데이'를 전면에 내세워 전국구 소주기업으로의 도약을 꿈꿔왔다. 하지만 지난해 말 부산 자갈치시장 상인들과 투명하지 않은 '뒷돈 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며 건실한 향토기업이라는 이미지에 상당한 흠집이 났다.
게다가 최근에는 임직원들에게 판매 목표량 달성을 못하면 퇴사한다는 각서까지 쓰게 한 사실까지 알려지며 무학의 전근대적인 '갑(甲)질' 조직 문화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무학이 지난해 대구지역 대표 주류업체인 금복주가 전근대적 조직 문화로 불매운동을 겪은 것처럼 '제2의 금복주'가 되는거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때문에 지난해 10월, 3년 만에 경영일선으로 복귀하며 새 출발을 선언한 최재호 무악 회장의 앞날에도 먹구름이 끼게 됐다. 최 회장은 무학의 창업주인 최위성 명예회장의 둘째 아들로 1988년 기획실장으로 입사해 1994년 대표이사에 오른 뒤 19년 만인 2013년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판매 목표량 달성 못하면 퇴사" 각서가 독려?
17일 업계에 따르면 무학은 이달 들어 대표 상품인 '좋은데이'를 재단장하면서 판매량을 늘린다는 목적으로 일부 임직원에게 각서를 요구했다. 각서에는 5월부터 오는 7월까지 3개월 간 신제품의 일정한 판매 증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직위와 직책을 해지하고 스스로 퇴사하며, 향후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각서의 대상은 동남권 영업본부의 본부장 및 지점장 등 10명이었다. 이어 일반 직원들에게는 개인별 신제품 판매목표 달성치를 제출하도록 요구해 내부 직원들의 불만이 들끓었다.
무학이 이처럼 임직원들에게 각서를 요구한 것은 최근 대선주조와의 부산 소주시장 쟁탈전이 다시 뜨거워졌기 때문. 부산 소주시장은 대선주조가 한때 90%까지 시장점유율을 차지했다가 2008년 전 대주주가 회사를 비싼 값에 사모펀드에 매각한 '먹튀 논란' 이후 점유율이 20% 아래로 떨어졌고, 그 틈을 무학이 파고들어 부산에서 70%에 달하는 점유율을 보여 왔다.
하지만 올 1월부터 대선주조가 '시원블루'의 도수를 낮춘 리뉴얼 제품 '대선블루'를 출시하며 빠르게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다급해진 무학은 5월에 '좋은데이' 리뉴얼 제품 출시로 시장점유율 수성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임직원들의 각서를 받는 '갑질' 행위를 저질렀다.
각서와 관련해 무학 측은 "'좋은데이 리뉴얼' 출시 이후 영업직 대상으로 일반적인 성과급 이외에 추가 인센티브 조건의 판매 독려 차원에서 일부 간부들이 결의를 다지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지점장 및 사업부장 일부가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현재 5명이 각서를 제출했으며 회사가 지시한 바는 없다"고 해명했다.
이어 "이전에는 이번처럼 각서를 받은 사례가 없었다"며 "일반 직원에 대해서는 목표달성에 대한 추가 성과급을 줄 계획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성과 달성을 하지 못하는 직원에 대해서 문책성 퇴사를 종용했던 사례 역시 단 한 차례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무학의 해명에도 업계 관계자들은 이번 각서 사태가 무학의 잘못된 조직문화가 민낯을 드러낸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 관계자는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퇴사까지 각오한다는 각서를 쓰게 하는 것은 회사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불공정 갑질행위가 아닐 수 없다"며 "같은 지역 소주업체인 금복주가 전근대적인 조직문화로 불매운동 등 소비자의 외면을 받은 것처럼 무학 역시 이런 문화를 당연시 한다면 더 큰 위기에 직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주류업체로의 도약에 '먹구름'
무학이 추락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0월 부산 자갈치시장과 무학소주 사이에 광고비를 가장한 거액의 '뒷돈 거래'가 이루어졌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부터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자갈치시장 상인회가 무학에 시장 2층 공사비 협찬금을 요청했고, 무학은 협찬금을 지원하는 대가로 상인들이 향후 2년간 경쟁업체 소주를 진열·판매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청탁했다. 이에 상인 26명은 경쟁업체 소주 2종류를 받지 않겠다는 각서를 무학측에 건넸다.
무학 측은 "상인회 측과 광고 선전비 명목으로 1억원의 계약을 했을 뿐 각서는 상인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알아서 작성한 것"이라고 관련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물밑 거래' 의혹만으로도 건실한 향토기업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무학의 도덕성은 치명상을 입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무학은 실적도 곤두박질 쳤다. 무학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519억원으로, 이는 662억원을 달성했던 전년과 비교했을 때 21.6% 줄어든 수치다. 전체 매출도 줄었다. 2783억원의 매출액을 올렸던 2015년보다 241억원 가량이 감소한 2542억원에 그친 것.
무학의 실적악화는 간판 브랜드인 '좋은데이'의 부진과 함께 순풍에 돛 단 듯 순항하던 과일소주 열풍이 식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2015년 여름 15% 육박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품귀현상까지 보이던 과일소주는 그해 겨울엔 한 자릿수 초반대로 판매량이 뚝 떨어졌다. 6가지 과일맛을 갖출 정도로 과일소주에 사활을 걸었던 무학에게는 뼈아픈 시장의 변화인 것.
이런 가운데 무학의 최대 시장이라 할 수 있는 부산에서 대선주조의 반격이 거세지자 위기감을 느낀 무학이 임직원을 대상으로 무리한 각서까지 요구하는 사태를 초래했다는 분석이다.
특히 이번 사태를 두고 지난해 10월 최고경영자(CEO)로 복귀한 최재호 회장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물이 아니냐는 의심이 커지고 있다. 3년 만에 복귀한 최 회장은 무학을 글로벌 주류업체로 키우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하지만 도덕성 타격, 실적 악화 그리고 갑질 각서 파문 등 악재가 연이어 터지며 '최재호 컴백 효과'는 전혀 빛을 보지 못하게 됐다.
업계 관계자는 "최재호 회장 컴백 이후 경영진이 실적 향상을 위해 무리수를 두고 있는 듯하다"며 "설사 결의를 다지기 위해 자발적으로 각서를 쓴 것이라는 회사 측 해명이 맞다하더라도, 각서를 쓰게 된 과정에 회사 내 위기의식과 매출 압박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보긴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어 "부산 지역에서 매출이 1~2% 떨어졌다고 회사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간다면 이후 더 큰 위기가 닥치면 어떨지 걱정된다"며 "그보다는 무학의 잘못된 조직문화의 바꾸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정혁 기자 jjangg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