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엔터스타일팀 양지윤 기자] 나비 한 마리의 작은 날갯짓이 지구반대편 태풍으로 이어진다는 '나비효과'. 그건 태평양에만 있는 게 아니다. 어느 무명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느닷없는 날갯짓이 패션업계를 뒤흔들고 있다. 벌써 그는 몇 번이나 패션계를 들었다 놨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무명은 아니다. 패션으로 먹고 사는 지구인 중 가장 핫한 존재가 됐다.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렉산드로 미켈레가 바로 그 나비. 미켈레의 사연을 살펴보자.
구찌 남성복 컬렉션이 다가오던 2014년 어느 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았던 프리다 지아니니가 갑자기 회사를 떠난다.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던 찰나, 수석 액세서리 디자이너였던 알렉산드로 미켈레가 바통을 이어 받는다. 그것도 컬렉션 5일 전에! 당시 그는 13년차 숙련된 직원이었으나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진, 묵묵히 맡은 바 소임을 다하던 소리 없는 디자이너였다.
쟁쟁한 실력자들을 제치고 구찌의 수장이 된 그는 기대와 의구심을 한몸에 받으며 컬렉션의 첫 발을 내딛었다. 결과는 실로 엄청났다. 남성복 컬렉션은 미켈레 집도 하에 심폐소생을 제대로 받았다. 구찌는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 너무 고리타분해지면서 '바닥을 쳤다'는 가혹한 평가 까지 들었지만 이때부터 180도 변신한다.
▲ 비주류의 반전, 너드 시크(Nerd Chic)
가장 눈에 띄는 그의 구찌 컬러는 너드(Nerd)다. 너드 룩, 흔히 긱 시크(Geek Chic)라고도 불린다. 너드는 특정 분야에 지식은 많으나 매력 없고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너드 룩은 그들만의 무드가 하나의 트렌드가 된 것을 의미한다.
2015년 F/W 컬렉션에서 선보였던 구찌의 너드 룩은 덥수룩한 헤어스타일에 커다란 뿔테 안경, 마치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한 실루엣까지. 괴짜스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개성'을 중시하는 특징은 스트리트와 유스 컬쳐 스타일링과 아이템을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너드는 부정적인 단어이지만, 미켈레 덕분에 꽤 핫한 키워드로 떠올랐다. 괴짜스러운 것과 유행에 대한 경계가 매우 모호해진 셈이다. 현재까지도 구찌의 화보 속에는 너드 풍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미켈레의 빈티지, 편안함, 그리움
빈티지란 옛 것을 재구성해 익숙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하면서도 개성을 찾아주는 정서적인 콘셉트를 말한다. 미켈레가 추구한 따스한 빈티지 감성은 차가운 도시 스타일에 지친 이들을 감성적으로 변화시켰다.
그의 빈티지는 할머니 옷을 입은 듯한 레트로한 분위기,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프린트와 패턴의 믹스 등 그만의 자유분방한 디자인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긴 기장의 플리츠 스커트, 풍성한 러플과 원색적인 컬러감 등은 그의 컬렉션의 대표적인 표현이자 현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레트로 열풍에도 걸맞는다.
▲미켈레가 꾸민 '몽환의 숲' 구찌 가든
미켈레의 컬렉션에서 또 하나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자연친화적 디테일이 가득한 '구찌 가든'이다. 꽃, 나비, 뱀, 꿀벌, 호랑이 등 다양한 동식물을 모티브로 몇 시즌째 선보이고 있으며, 몽환적인 분위기와 강렬한 색채감으로 대중을 매료시켰다. 구찌에 대한 미켈레만의 감성을 녹인 '모던한 토템'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호랑이 문향이나 볼드하게 그려진 플라워 프린팅은 현재 우리나라 길거리에서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는 패턴으로 자리 잡았다.
▲여성성과 남성성, 정중앙을 파고든 미켈레의 감성
수트를 입은 여성과 레이스 셔츠를 입은 남성. 2015 F/W 컬렉션에서 등장한 미켈레의 성 정체성은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라는 고정관념을 '격파'했다. 매니시와과 페미닌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컬렉션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다.
미켈레는 젠더의 통합을 추구하기 보다는 순수한 아름다움의 종류를 찾는 것에 더 집중했다. 패션지 '보그' 영국판과의 공개 대담에서 그는 "나는 젠더보다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의 관점에서 패션을 시작했다. '아름다움'이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존재"라고 말했다.
최근 유행인 머스큘린 룩(여성이 남성적인 스타일로 옷차림을 하는 경우)에도 미켈레의 사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듯 하다.
너드, 빈티지, 자연친화, 젠더리스까지. 구찌에 대한 미켈레만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는 성공적으로 대중을 겨냥했다. 획일화 됐던 구찌에 자유분방한 그림을 그려넣은 미켈레 덕분에 구찌는 승승장구 중이다.
알렉산드로 미켈레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후, 구찌는 매해 두 자릿수 성장을 거듭하는 중이다. 수많은 명품 업체가 매장을 접고 어려움을 겪는 현재, 구찌는 지난해 매출이 17% 이상 늘었다. 구찌의 모기업 케링(Kering)의 주가는 1999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켈레 덕분에 컬렉션의 주인공은 디자이너가 아니라 '옷'이 됐다. 사람들은 디자이너보다 새로운 옷에 열광했다. 그 덕분에 구찌의 아이덴티티가 트렌드의 중심에 서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구찌의 변화는 명품 브랜드를 바라보는 대중의 기대가 변화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로고를 통한 상징과 과시성에서, 디자이너가 주는 심미학적 가치를 넘어, 이제 고객 스스로가 판단하는 브랜드 자체의 모습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구찌는 가장 먼저 작은 디자이너의 시대를 열였다. 13년간 묵묵히 액세서리를 디자인했던 그의 작은 잠재력이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패션 산업을 뒤흔들고 있다. 알렉산드로 미켈레는 앞으로 명품 브랜드가 걸어가야 할 방향, 즉 새로운 세대에 적응해야 하는 패션 업계를 대변하고 있다. 앞으로 패션 산업에 미칠 그의 효과가 더욱 기대된다. 또 어떤 재미난 아이디어로 우리의 심장을 움켜쥐게 할 지, 그의 구찌 컬렉션이 더욱 기다려진다.
사진=구찌, yangjiyoo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