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을 따라 벚꽃잎이 춤추듯 흩날리고 있다. 꽃비가 내리는 그 길 사이로 '쇼트트랙 퀸' 최민정(19·성남시청)이 나비처럼 사뿐히 걸어왔다. 만면에 봄을 닮은 환한 미소가 가득하다. "수업이 이제야 끝났어요."
스케이트 부츠를 벗은 최민정의 일상은 여느 대학 새내기와 크게 다를 게 없다. 과제 걱정에 한숨을 푹푹 내쉬고 하고싶은 것도 참 많은 스무살의 청춘, 그 자체다. 하지만 평범한 여대생은 빙판 위에 들어서는 순간, 평창의 희망이자 '쇼트트랙 에이스'로 돌변한다. '두 얼굴'의 그를 신촌 연세대 캠퍼스에서 만났다.
▶천재 소녀의 등장
천재의 등장은 강렬했다. 여섯 살 때 처음으로 쇼트트랙을 탔다는 최민정은 시니어 데뷔와 동시에 세계 무대를 점령했다. 그는 생애 첫 출전한 2015년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선수권에서 종합 1위를 차지하며 정상에 우뚝 섰다. 최민정이 일으킨 바람은 거셌고 매서웠다. 단순한 깜짝 돌풍이 아니었다. 그는 이듬해 열린 2016년 세계선수권에서도 종합 1위 자리를 굳게 지키며 왕좌를 지켰다. 주변에서는 그를 두고 '천재소녀'라 불렀다. 하지만 최민정은 '천재'라는 말에 부끄러워했다. 쉽게 얻은 왕관은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재미있어 보여서 선수반에 등록하기는 했는데, 잘 하는 선수는 아니었어요. 터닝포인트는 중학교 2학년 때였죠. 제 꿈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마인드가 바뀌니 행동도 바뀌었고요. 중학교 3학년 때 주니어 선발전을 준비하면서 훈련량을 굉장히 많이 늘렸어요. 엄청 힘들게 준비했는데, 이제와 돌이켜보니 그때 제 실력이 엄청 많이 는 것 같아요."
폭풍 훈련은 지금도 계속된다. 그는 일과는 훈련의 연속이다. "시즌에 돌입하면 하루 10시간 정도 훈련해요. 오전, 오후 훈련은 물론이고 저녁 먹은 뒤에 재활을 하거나 개인 훈련을 하거든요.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 많은 시간은 아니지만,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어요."
▶바람을 맞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노력하는 천재' 최민정에게 '위기'는 남의 일 같아 보였다. 실제 그는 2016~2017시즌 ISU 월드컵 1~4차전에서 매 대회 금메달 2개씩을 목에 걸며 환하게 웃었다. 2017년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에서도 1500m와 3000m 릴레이에서 정상에 오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올 시즌 세계선수권 3연패는 물론,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의 금메달 획득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시련 없이 피는 꽃은 없는 법. 최민정은 3월 막을 내린 세계선수권에서 종합 6위에 머물렀다. 나쁜 성적은 아니지만 최민정이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은 처음 치르는 종합 대회였어요. 그때 '책임감은 갖되 부담감은 덜 갖자'고 마음먹었어요. 편하게 하려고 노력했죠. 그런데 세계선수권은 아니었어요. 2연패를 한 뒤에 많은 관심을 받았고, 개인적으로 욕심을 내기도 했어요."
처음 받아본 성적표에 당황스러웠던 것도 사실. 그러나 최민정에게 좌절은 없었다. 그는 "결국은 제 준비가 부족했던 거죠. 준비가 잘 돼 있었다면 컨디션이 좋지 않았어도 흔들리지 않았을 거에요. 컨디션도 선수가 조절해야 할 몫이잖아요"라며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링크에 들어섰다. 최민정은 2017~2018시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보란 듯이 전체 1위를 차지하며 평창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이번 경험을 통해 배운게 참 많아요.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요."
▶평창, 인생 최고의 도전을 앞둔 스무 살
눈부신 스무 살, 꿈꾸는 모든 것이 이뤄질 것만 같은 찬란한 시기다. 최민정 역시 하고 싶은 일이 많다. 그는 "대학생이 됐잖아요. 친구들이랑 놀고 싶어요"라며 작은 바람을 드러냈다. 그러나 지금은 잠시 미뤄뒀다. 더 큰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최민정은 "지난해 12월 강릉 아이스아레나에서 테스트이벤트가 열렸는데, 금메달을 땄어요. 올림픽이 열리는 곳에서 금메달을 따니 정말 기분이 좋더라고요. 운동선수로서 최고의 영광은 올림픽 금메달이 아닐까 싶어요. 지금 저는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을 앞두고 있어요. 긴장도 많이 되지만 설레요. 후회 없이 준비하고 싶어요"라고 다부지게 말했다.
스무 살의 꿈은 아름답다. 하지만 빛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나 스스로를 끝없이 의심하며 묻고 또 묻는다. 하지만 꿈에 도달하는 법을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과정은 아름답지만, 결과는 하늘에 맡기라'는 말을 들었어요. 이제는 저를 조금 더 믿었으면 좋겠어요."
빙상장을 벗어나 마주한 최민정은 '표정부자'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감정이 풍부했다. 까르르 웃다가, 성적 얘기에 이내 심각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태극마크를 달고 경기장에 들어선 최민정은 '포커페이스' 그 자체다. "저는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경기에 나서는 거잖아요. 책임감이 있어요. 당연히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요. 부담은 있지만, 경기가 끝난 뒤에 웃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노력하는 천재, 스무 살 최민정의 시선이 평창을 향하고 있다.
김가을 기자 epi17@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