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재야, (홍)정남이형한테 밥 샀어? 안 샀으면 빨리 사."
지난달 18일 K리그 클래식 3라운드 인천 원정(0대0무) 후, 최강희 전북 현대 감독은 '1996년생 센터백' 김민재에게 농담을 던졌다. 올시즌 K리그에 데뷔한 당찬 수비수 김민재는 인천전에서 지옥과 천당을 오갔다. 프로 무대에서 처음으로 페널티킥을 내줬다. 정신이 아뜩한 순간, '든든한 형님' 홍정남이 온몸으로 골을 막아냈다.
#. "홍정남 선수가 선방해주고, 무실점 경기를 계속해주는 부분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지난 1일 K리그 클래식 4라운드 서울전(1대0 승) 후, 최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이례적으로 골키퍼 홍정남을 언급했다. 전북이 4경기 연속 무패를 달린 날, 취재진의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먼저 홍정남의 활약상을 칭찬했다.
2007년 전북 입단 이후 선배들의 그늘에 가렸던 골키퍼 홍정남은 2017년 봄, '1강' 전북에서 가장 주목받는 선수가 됐다. 매경기 후 믹스트존에는 그를 기다리는 취재진이 넘쳐난다. 기다림이 참 길었다. '스무살 청춘'이 '서른살 어른'이 된 10년의 세월, '11년차 골키퍼'는 마침내 '넘버1' 등번호를 받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리그 개막 후 4경기에서 단 1실점했다. 개막전에서 전남에 1골을 내줬을 뿐, 수원, 인천, 서울전에서 3경기 연속 무실점이다. 4경기 21개의 유효슈팅 중 무려 20개를 막아냈다. 경기당 평균 0.25골, 리그 최소실점이다. 홍정남과 동고동락해온 'K리그 레전드' 최은성 전북 골키퍼 코치가 '잘나가는 후배' 이야기에 반색했다.
▶"10년의 노력이 보상받았다"
최 코치는 "지난 10년, 오랜 노력이 보상받은 것"이라며 웃었다. 지난 1월 말, 주전 골키퍼 권순태가 J리그 가시마 앤틀러스로 이적했다. 최 코치는 "(권)순태가 떠난 후 감독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두바이 전훈지에서 있는 선수들로 한번 해보자고 하셨다. 정남이에게 힘을 실어주셨다"고 했다. 그렇게 10년만에 기회가 찾아왔다.
지난달 5일, 기대반 우려반이던 전남과의 개막전, 최 코치는 "걱정하신 팬들도 있겠지만 워낙 열심히 준비했기 때문에 나는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며 웃었다. "수비진이 많이 바뀌어서 첫 경기에 부담을 줄까봐 그점만 걱정했는데 잘해줬다"고 평가했다. 김민재, 이용 등 올시즌 가세한 새 수비라인과도 끈끈한 호흡을 보여줬다. 개막전 승리 후 관중석에서 맘 졸이던 홍정남의 부모님은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최 코치는 "정말 대단한 일이다. 2-3번 골키퍼는 정말 힘들다. 10경기에 1번 올까말까한 기회를 무작정 기다린다. 가족들도 많이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최 코치는 올시즌 4경기 중 인천전을 홍정남의 베스트 경기로 꼽았다. "인천전을 잘했다. PK도 잘 막았지만, 내용이 좋았다. 사실 수원, 서울보다 인천이 더 어렵다. 예측불허의 변수가 많다. 정신무장을 강하게 한 라이벌전보다 실점 장면, 찬스도 더많이 나온다. 그런 게임을 더 집중해야 한다."
▶"묵묵한 조연이 돼라"
K리그 532경기 출전에 빛나는 '백전노장' 최 코치가 '늦깎이 주전' 홍정남에게 늘 강조하는 말은 "묵묵한 조연이 돼라"는 것이다. "경기에서 주연이 될 생각은 말아라. 조연이 돼라. 주연이 되려고 하다보면 오버하게 된다. 뒤에서 묵묵히 앞에서 뛰는 선수들을 도와준다고 생각해라. 그러면 어느 순간에 주연이 될 수도 있다."
올시즌 '0점대 방어율 목표'에 대해서도 최 코치는 신중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평정심을 흔들 수 있는 과욕은 경계했다.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찬성이다. 그러나 욕심이 생겨서 너무 잘하려 하다보면 실점때 불안감이 생기고, 흔들릴 수 있다. 욕심은 마이너스다. 골키퍼는 심리적 요인이 가장 크다. 매경기 마음을 비우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어느새 '방어율 0점대' 목표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
홍정남은지난 10년간 최은성, 권순태 등 '리그 최강' 선배들 아래서 어깨 너머로 좋은 습관을 체득했다. 10년을 버틴 '인간승리' 인내심에 최 코치와 선배들로부터 이어받은 단단한 내공이 더해졌다. 최 코치는 "평소 생활, 경기 준비, 몸관리 등 도움이 된 측면도 있겠지만 정남이 본인이 성실한 선수다. 몸관리도 굉장히 잘한다. 스스로 개인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런 부분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동생 홍정호과 '형제국대', 못하란 법 있나"
알려진 대로 홍정남은 '국가대표 센터백' 홍정호(28·장쑤 쑤닝)의 형이다. '형제 축구선수'로 종종 언급됐지만, 수비수 최초의 분데스리거였던 동생의 이름값에 가린 것이 사실이다. 전북 팬들은 홍정남의 활약에 열광하고 있다. '홍씨 형제'가 함께 태극마크를 달 날을 기다린다. 최 코치 역시 '형제 국대'가능성을 긍정했다. "불가능한 법은 없다. 정남이가 지금처럼 잘해주다 보면 대표팀에 안 뽑히라는 법도 없다. 정남이한테도 이야기했다. '동생하고 같이 한번 들어가라. 못하란 법이 어딨냐'고 했다"며 웃었다. 골키퍼로서의 장점을 묻자 "신체조건이 좋다. 스피드도 있고, 탄력도 좋다. 성실하다"고 즉답했다.
"정남이가 한국나이로 서른이다. 권순태도 31세에 대표팀에 들어갔다. 나도 2002년 한일월드컵 때 31세였다. 골키퍼는 서른 넘어야 전성기가 온다. 어느 정도 경력, 구력도 쌓이고 노련미도 생긴다. 몸도 제일 좋다. 30대 접어들면서 절정의 기량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정남이는 이제 시작이다.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