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내 경기침체의 골이 깊어지면서 서민가계가 극도로 허리띠를 졸라맨 것으로 나타났다. 월 평균 가계소득 흑자는 연간 단위로 최대치를 기록했지만 식료품·비주류음료 지출은 통계 작성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줄었고 오락·문화 지출은 12년만에 처음 감소세를 보였다. 옷, 교육, 차, 휴대폰 지출도 감소했다. 빚이 늘면서 채무조정 신청과 은행 예·적금 해지 비율은 증가했다. 결국 서민가계는 지출을 줄임으로써 '불황형 흑자'을 기록했다.
26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연간 가구당 월평균 소득(전국 2인 가구 이상)은 439만9000원이다. 가구당 월평균 가계지출은 336만1000원으로 가구당 월평균 흑자액은 103만8000원인 것으로 집계됐다.
연간 단위로 가구당 월평균 흑자액이 100만원을 넘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지난해 가구당 월평균 흑자액은 2003년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대 규모다.
그러나 경제전문가들은 지난해 가계흑자를 두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일반적인 흑자와 달리 불황형 흑자의 경우 경기침체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입을 모은다. 대출 상환과 이자부담 등에 소비를 줄이다 보여 가계소득은 흑자로 돌아설 수 있으나 내수 경제 악화로 기업의 수익성 감소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기업의 수익성 감소는 투자와 고용 감소로 이어지고, 고용문제에 따른 부채상환능력으로 연결된다. 부동산 가격 하락을 부추기면 가계지출 감소는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가계지출 감소를 두고 국내 경기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우려는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가구당 식료품·비주류음료 소비지출은 월평균 34만91000원으로 1년 전보다 1.3% 감소했다. 2003년 통계 작성 이후 감소폭이 가장 컸다. 지난해를 제외하고 식료품 등의 지출이 감소했던 때는 2009년(-0.2)과 2013년(-0.3) 두 번뿐이었다.
지난해 먹거리를 제외한 의류·신발 등의 평균 지출은 15만8000원으로 전년대비 2.4% 줄어들며 3년 연속 감소세를 보였다.
휴대폰 기기 구입 감소로 지난해 통신장비 지출은 15.2% 감소했고 자동차 구입은 4.5% 줄었다. 단체 여행비, 서적, 캠핑 및 운동용품 등이 포함되는 오락·문화 지출도 0.2% 줄었다. 오락·문화 지출이 감소한 것은 2004년 이후 처음이다. 무엇보다 가계지출에서 가장 마지막에 줄인다고 알려진 학원 등 교육 지출도 0.4% 줄어 2년 연속 감소세를 보였다.
반면 술과 담배의 가계 지출은 전년대비 5.3%가 증가했다. 가격 인상 효과로 비춰질 수 있지만 가계 운영에 있어 힘든 마음을 달래기 위한 탈출구로서의 효과가 더욱 컸던 것으로 보인다.
경기침체로 인해 운에 베팅하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 이를 대변한다.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복권판매 수입은 3조8404억원으로, 전년보다 8.4% 증가했다. 판매액이 아직 확정된 수치가 아닌 만큼 더욱 늘어날 수 있는 금액을 빼도 역대최대치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또 있다. 빚이 늘면서 채무조정 신청과 은행 예·적금 해지 비율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6년 정기예금과 적금의 중도해지비율은 35.7%였다. 예금과 적금의 중도해지비율은 2014년 33.0%, 2015년 33.4% 등으로 계속 증가하고 있다. 낮은 금리 영향도 있지만 살림살이가 팍팍해져 미래를 위해 준비했던 예금과 적금을 해지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해 소독이 부진해 빚이 늘어나 채무조정 신청에 나선 이들이 많은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신용회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채무조정 신청자는 9만6319명으로 2015년보다 5.2%(4799명) 증가했다. 2014년 8만5168명까지 떨어졌던 채무조정 프로그램 신청자는 최근 2년 연속 증가했다. 특히 20대와 60세 이상에서 채무조정 신청자 증가율이 높았다.
채무조정 신청자 중 29세 이하는 1만1102명으로 전년보다 16.6% 늘어 증가율이 가장 컸고 60대 이상 증가율은 10.5%로 29세 이하의 뒤를 이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민간소비를 위축에 따른 국내 경제침체 위기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정부는 이 같은 점에 주목, 경제 안정화를 위해 가계부채 관리와 소비 진작을 위해 지난주 내수활성화 대책을 발표하는 등 다양한 정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최근 정부가 내수 활성화를 위한 정책을 내놓았지만 실질소득 증대 없이는 큰 효과가 없을 것"이라며 "가계 소득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일자리 대책 등과 연계된 중장기적 정책 수립과 금리인하 및 기업 투자 촉진 등도 살펴 볼 필요가 있을 듯 보인다"고 말했다. 김세형 기자 fax123@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