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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의 발품스토리]아스널 상대 5부리그 서튼이 보여준 90분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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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튼(영국 런던)=이건 스포츠조선닷컴 기자]기적은 없었다. 아스널이 20일 밤(현지시각) 영국 런던 서튼 겐더 그린 레인에서 열린 넌리그인 내셔널리그(5부리그) 소속 서튼 유나이티드와의 2016~2017시즌 잉글랜드 FA컵 16강전에서 2대0으로 승리했다.

서튼은 18일 번리를 1대0으로 누른 링컨시티(5부리그)에 이어 또 한 번 너리그팀의 기적을 꿈꿨다. 비록 결과는 얻지 못했다. 그러나 서튼과 서튼의 팬들에게는 이날 경기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 기적의 90분 현장을 취재했다.

▶자원봉사 감독, 외판원 선수들

서튼은 런던 남쪽 한적한 주거지에 있다. 한국인들이 많이 몰려사는 뉴몰든과 가깝다. 1898년 설립됐다. 프로리그에는 단 한번도 올라온 적이 없다. 하부리그, 그것도 아마추어리그만 전전했다.

일주일에 훈련은 두 차례만 있다. 팀 최다 연봉 선수의 주급은 600파운드(약 85만원)다. 아스널 메수트 외질은 일주일에 14만파운드(약 2억29만원)를 받는다.

서튼의 감독 폴 도스웰은 연봉이 없다. 자원봉사로 팀을 지도한다. 오히려 사비를 털어 경기장에 인조잔디를 깔았다. 선수들의 직업은 다양한다. 외판원, 헬스 트레이너, 건물 경비원, 기간제 교사를 겸하고 있다.

▶월드컵 결승전

겐더 그린 레인이 있는 웨스트 서튼역에 도착했다. 플랫폼 너머 경기장이 보였다. 경기 시작 1시간 전, 이미 수많은 서튼 팬들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5000석 규모의 경기장이었다. 이 가운데 좌석은 765석에 불과하다. 본부석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공간들은 모두 입석이다. 이미 여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피치 바로 앞 광고판 뒤까지 팬들이 가득했다. 흡사 100년 전 영국 축구 다큐멘터리 필름을 보는 것 같았다.

서튼 팬들은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도스웰 감독은 경기 하루 전 기자회견에서 "AFC윔블던(3부리그)과 맞붙었던 3라운드는 FA컵 결승과도 같았다. 리즈 유나이티드(2부리그)와 격돌했던 4라운드는 유로 결승이었다. 이제 아스널과 맞붙는 내일은 우리에게 월드컵 결승전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서튼 팬들 모두 그런 분위기였다. 경기장에서 만난 한 팬은 "이 경기 자체가 꿈이다. 우리가 언제 아스널과 만나겠느냐. 이곳에서 저런 선수들을 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했다 .

▶보링 그리고 온리 원 골

경기가 시작 직전 도스웰 감독은 경기장을 한바퀴 돌았다. 팬들에게 박수를 치며 열띤 응원을 당부했다. 팬들은 화답했다. 응원은 대단했다. 선수들이 뛰는 것보다 더 관중석에서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불렀다.

아스널 선수들이 볼을 잡으면 "보링(boring, 지루하다)"을 외쳤다. 짧은 패스로 썰어가는 아스널의 스타일이 지루하다는 비아냥이었다. 아스널의 스타 선수들이 볼을 잡으면 "웨이스트 오브 머니(waste of money)"를 외쳤다. 돈 낭비라는 뜻이었다.

아스널은 의외로 고전했다. 인조잔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슈팅이 빗나가거나 골키퍼 선방에 막힐 때마다 서튼 팬들은 "컴온 옐로(yellow, 서튼의 팀색 노란색)"를 외치며 응원을 펼쳐나갔다.

골을 허용해도 개의치 않았다. 전반 27분 루카스 페레스, 후반 9분 시어 월콧이 골을 넣었다. 그 때만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이내 다시 목소리를 높이며 응원을 펼쳤다. 후반 19분 디콘의 중거리슈팅이 아스널의 골대를 때렸다. 기점이었다. 5000여 서튼팬들은 '단 한골'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서튼의 공격이 펼쳐질 때마다 "온리 원 헤더(only one header, 단 하나의 헤딩슛)!" "온리 원 골(only one goal)!"을 외쳤다.

▶해학이 넘치는 난입

전반 초반이었다. 한 남성이 속옷바람으로 경기장에 난입했다. 서튼의 마스코트인 기린 가면을 머리에 쓴 채였다. 잠시 잠깐 경기장을 돌더니 알아서 나갔다. 5000여 서튼 팬들에게 주는 메시지였다.

경기 종료 5분 전 장내 아나운서는 "경기가 끝나면 제발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지 말아주세요"라고 방송을 했다. 1분 전에도 같은 방송을 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서튼 팬들은 '역시나' 말을 듣지 않았다. 휘슬이 울리자마자 꽤 많은 팬들이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다만 해학이 있었다. 한 팬은 그대로 알렉시스 산체스에게 달려갔다. 어깨동무를 한 채 셀카를 요구했다. 산체스는 난색을 표했다. 그리고는 라커룸으로 줄행랑을 쳤다. 다른 아스널 선수들도 빨리 라커룸으로 향했다. 서튼 팬들은 대부분 경기장을 뛰며 빅매치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물론 불상사가 일어날 뻔도 했다. 몇몇 혈기 왕성한 서튼 팬들은 아스널 원정 서포터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경찰과 안전요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또 다른 몇몇 팬들은 골대 위에 매달렸다. 골대를 무너뜨리려 했다. 그러자 관중석에 있던 서튼 팬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들에게 "바보짓 하지 마라"라며 소리를 질렀다. 머쓱해진 그들은 조용히 골대에서 내려왔다.

의미있는 장면도 나왔다. 45세 골키퍼인 웨인 쇼는 경기 후 관중석으로 달려갔다. 팬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응원에 감사했다. 도스웰 감독도 경기장을 돌며 감사를 표했다. 서튼 팬들은 "고마워요. 폴 도스웰"이라는 플래카드를 들어내비치기도 했다.

아르센 벵거 아스널 감독은 경기 후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는 "정말 조직력이 좋았고 선수단과 팬들 모두 열정이 대단했다. 우리가 준비를 조금만 덜했더라도 탈락했을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아스널은 경기 후 서튼에 5만 파운드의 기부금을 내며 훈훈함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