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자들은 메달을 목에 걸고 '영웅' 김연아와 악수를 나눴다. 유망주 꼬리표를 떼고 전설에 한걸음씩 다가서고 있는 미래들과 이들을 응원하는 전설 간의 아주 특별한 교감. 한국 피겨사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상징하는 그림이었다.
김연아 이후 꽁꽁 얼어붙었던 한국피겨에 봄이 찾아왔다. 8일 강릉아이스아레나에서 막을 내린 제71회 전국남녀 피겨스케이팅 종합선수권대회는 달라진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던 희망의 무대였다. '남자 김연아' 차준환(휘문중)의 등장으로 남자 피겨는 구심점을 얻었고, 여자 피겨는 '리틀 연아'들의 치열한 경쟁 속에 190점을 돌파하는 성과를 거뒀다. 남녀 모두 뛰어난 경기력과 의미있는 기록을 남기며 '여왕'의 은퇴 후 '새로운 르네상스'를 여는 시대의 주인공 탄생을 예고했다.
▶차준환 끌고, 형들 자극 받고
'남자 김연아'라는 수식어는 의미 없는 수식어가 아니었다. 국제 무대에서 경쟁력을 과시했던 차준환은 처음으로 종합선수권 1위에 오르며 명실공히 국내 최고로 자리매김했다. 차준환은 8일 끝난 남자부 싱글 1그룹에서 쇼트프로그램 81.83점과 프리스케이팅 156.24점을 묶은 238.07점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프리스케이팅에서 살짝 아쉬운 실수가 나왔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2위 김진서(한체대·216.16점)에 20점 이상 앞선 압도적인 우승이었다.
그를 지도하는 브라이언 오서 코치의 말대로 '토털 패키지' 기량을 보였다. 스피드와 점프, 표현력 등 나무랄데가 없었다. 특히 쿼드러플 살코를 완벽히 구사하며 '4회전 점프'에 대한 경쟁력을 과시했다. 특히 쇼트프로그램에서는 한국선수 최초로 80점 고지를 넘었다. 향후 4회전 점프 추가와 콤비네이션 점프 변화 등 구성 요소를 손보고, 체력을 보완할 경우,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선전이 가능하다는 평가다.
이런 차준환의 등장으로 형들도 자극을 받기 시작했다. 김진서와 이준형(단국대)는 차준환 등장 전 남자 피겨를 이끌었지만, 최근 주춤하고 있었다. 하지만 차준환의 등장이 분위기를 확 바꿨다.
김진서는 같은 날 생애 처음으로 4회전 점프인 쿼드러플 토루프를 깨끗하게 성공시켰다. 4회전 점프는 국제 무대에서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필수 요소다. 김진서는 이번 성공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오른 손목 인대를 다쳤다.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집념의 김진서는 난관을 딛고 기어이 성공시켰다. 김진서는 "(차준환이) 신경이 안쓰인다면 거짓말"이라며 "내가 할 것을 더 잘하자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준형도 "차준환이 잘하는 것을 보면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차준환의 각성 효과였다.
▶여자 피겨 키우는 '경쟁의 힘'
연기가 끝나면 하나 같이 눈물을 흘렸다. 실수의 아쉬움이 컸지만, 1위를 향한 경쟁심이 만든 눈물이었다.
남자 피겨가 차준환 시대라면 여자 피겨는 말 그대로 춘추전국시대다. 이번 대회 여자부 최종 승자는 임은수(한강중)였다. 그는 여자부 싱글 1그룹에서 쇼트 64.53점과 프리 127.45점을 합해 총점 191.98점으로 1위에 올랐다. 하지만 2위 그룹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2위 김예림(도장중·183.27점)부터 5위 유 영(문원초·180.88점)까지 모두 180점을 넘었다. 대회 내내 피말리는 접전을 펼친 이들은 한국 여자 피겨를 한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그 결과가 임은수가 얻은 190점 돌파였다. 김연아 은퇴 후 첫 쾌거다.
임은수 김예림 유 영 등 2022년 베이징동계올림픽 기대주들은 은반 밖에서는 둘도 없는 친구다. 하지만 대회장만 들어서면 눈빛이 달라진다. 경쟁은 곧 성장으로 이어진다. 임은수는 "국제 대회에 출전하면서 내 페이스를 찾는 법을 배웠다. 긴장해도 마음을 다잡는 방법도 깨달았다"고 했다. 김예림은 "임은수 유 영이 모두 종합선수권 우승을 차지했다. 나는 이번에 첫 입상이라는 점에 의미를 두겠다. 이달 중순 동계체전에선 꼭 우승하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종합선수권을 수놓은 여자 스케이터들은 하나같이 높은 수준의 점프와 스케이팅 실력, 표현력을 자랑했다. 유망주들의 동시 성장, 한국 피겨 입장에서는 다시 오기 힘든 재도약의 기회다. 이들이 꾸준히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다면 한국 피겨는 또 한번의 기적에 성큼 다가설 수 있다.
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